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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캐년과 차이코프스키
  글·김종철 (충남의대 진단방사선과 교수. 뉴 셀프 상담연구원 신실회 대표. 늘사랑교회. ㅣ E-mail : )
얼마 전에 다녀온 결혼식은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서울의 어느 전통 있는 교회당에서 거행된 이 결혼 예식의 주례자가 (대부분의 경우처럼 남성이 아니라) 은퇴한 지 꽤 되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목사님인 것부터가 꽤나 이색적이었다.

신랑이 혼자 먼저 입장하였다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들어오는 신부를 맞는 전통적인 예식 순서와는 달리, 신랑 신부가 손을 잡고 같이 입장하는 것도 남녀평등의 정신에 부합되는 것 같아 참 보기 좋았다. 신랑 신부의 살아온 여정을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보여주는 것은 요즈음에야 흔해 빠진 일이 되었지만, 오래 전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우리로서는 마냥 부럽기만 하였다.

주례를 등지고 하객을 향해 서 있는 신랑 신부를 빙 둘러싼 채 그 두 주인공을 향해 축가를 부르는 신랑의 친구들, 하객들이 아닌 신랑 신부를 향해 마이크를 잡고 독창을 하는 성악가, 그리고 신랑 신부를 쳐다보며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어 합창을 하는 찬양대의 모습도 참 새롭기만 하였다.

연주되는 축가를 따라 부르며 곡이 끝날 때마다 열렬하게 박수를 치고 또 열정적으로 휘파람을 불어대는 젊은 하객들의 꾸밈없는 축하는 결코 경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랑 신부의 전도를 축하하기에 안성맞춤인 것 같았다.

성혼 선포 이후 한 쌍의 부부가 되어 앞으로 살아 갈 긴 세월 동안 서로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수없이 서로 다투기 십상일 텐데, 그 다르다는 것을 틀린 것으로 오인하지 말고,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대방을 자기 영성(靈性) 개발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가라는 주례자의 말도 상당히 감명 깊었다.

나이 여든이 되어서야 겨우 남녀 및 배우자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더라는 주례자의 진솔한 고백에도 상당히 공감이 갔다. 신랑 신부가 양가 부모에게 인사를 올릴 때도 신랑이 예식장 바닥에 덥석 엎드려 큰절을 올리고, 장인이 사위에게 악수를 하고 어깨를 두드려 주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모습 역시 정감이 흘러넘치는 장면이었다.

하객들에게까지 큰절로 인사를 올리는 신랑이 참 믿음직스러웠다. 두 주인공의 앞날을 한껏 축복한 후에, 신랑과 신부가 (팔짱을 끼지 않고) 대등하게 손을 맞잡고 퇴장하도록 주문한 주례자의 지혜와 안목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신혼여행을 떠날 한 쌍을 마음껏 축하하면서도, 우리 부부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이들의 장래에 대해 일말의 불안감을 금할 수 없었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저렇게 공개석상에서 서로 사랑한다고 자기 의사를 당당하게 표현하면서도, 결혼 생활이 채 몇 년도 되기 전에 서로 갈라서는 부부들이 많은 우리네 현실 때문에 말이다.

결혼 초기에 벌써 인터넷, 게임, 술을 비롯한 약물, 도박, 성(性), 쇼핑, 일 중독 등에 빠져서 그렇게 사랑하던 배우자의 마음을 마구잡이로 찢어놓다가, 마침내 이혼이라는 수렁으로 빠져버리는 신혼부부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기에 말이다.

서로 간에 대화의 방법도 제대로 터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하였기에, 한 집에 살면서 부닥치는 갈등이 심해지는 신혼부부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다. 절제되고 여과되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담아 퍼붓는 폭언이 많아지면서 점차 서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별거 혹은 딴 방을 사용하거나, 나중에는 아예 서로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는 불상사가 적지 않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부부가 이런 관계로 치닫게 되면 배우자 중 한 쪽(특히 아내)이 자기의 성을 무기로 삼아 상대방의 성적 접근을 아예 차단시켜 버리는 경우가 많아, 부부 관계가 더 악화되는 악순환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

인생의 후반전(後半戰)에 들어선 우리 부부는 서로의 감정이 격화되거나 화가 났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쌍스러운 욕설이나 상대방을 모욕하는 저속한 말이 아니고 일상에서 흔히 쓰는) 좋은 말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상대방의 분노를 즉각 파악하여 나의 행동을 자제하며, 또 말하는 당사자도 그 말을 내뱉음으로써 화가 좀 풀리는 말을 탐색해 나갔다.

우선 말하고 듣기에 좋은 뉘앙스를 가지면서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를 골라 보기로 하였다. 혹시 누가 옆에서 우리의 말을 듣더라고 우리의 의도를 잘 눈치 채지 못하는 말이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채택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점잖은 어느 분이 우리에게 재미있는 농담을 해준 것이 우리의 언어 선택에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차이코프스키”(독일 낭만파 음악에 슬라브적인 정열, 감상, 우울을 가미하고 화려한 리듬, 동양적인 선율을 살려 비창 교향곡,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의 걸작을 남긴 저명한 러시아 작곡가)라는 이름을 엽기적으로 풀이하였기 때문이었다.

듣는 순간 참 우습고 재미있긴 하였지만, 막상 우리가 사용하기에는 차이코프스키에게 큰 실례가 되는 것 같고 또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여러분들에게 공개하기가 참 어렵고 민망하기도 하다.

사실은 우리 부부 사이에 서로 울타리가 필요할 때 쓰고자 한 비밀스러운 은어인데, 이 번에 할 수 없이 공개하게 됨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차에서 코 푼 새끼”라고 털어놓아야 하는 내 마음이 결코 편하지는 않다. 아무튼 이 말을 듣는 순간 나에게는 하나의 대구(對句)가 바로 떠올랐다.

오래 전에 어느 저명한 지도자가 미국 여행을 다녀오면서 우리에게 얘기해 준 단어이었다. 지독하게 시집살이를 시키는 어느 시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고 싶은 착한 며느리가 있었단다.

장기간 저축하여 마련한 돈으로 시어머니를 그랜드캐년(Grand Canyon: 미국 유우타주로부터 애리조나 주에 걸쳐 있는 큰 계곡. 콜로라도 강이 콜로라도 대지를 침식해서 이룬 국립공원)에 관광 여행 보냈는데, 그 시어머니가 ‘그랜드캐년’이라는 복잡한 이름을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어 자기 나름대로 “그년도 개년”으로 알고 말하더라는 우스개 소리이었다.

그래서 상기의 두 단어를 우리가 사용하기로 하였다. 아내가 나에게 화가 나면 나를 보고 “차이코프스키!”, 내가 아내로 인해 성이 나면 아내에게 “‘그랜드캐년!”이라고 부르도록 우리 부부가 합의하게 된 것이었다. 상대방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서로가 주의를 하면서 자신을 추스르고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애를 쓰자는 작전 타임의 신호로 여기도록 동의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가까운 부부 사이라도 서로의 고유한 영역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 부부가 너무 상호의존적(codependent)이어도 곤란하고 또 서로가 상대방을 자주 거절(reject)해도 위험하다. 각자의 경계선(boundary)을 존중하고 보호해줄 줄 아는 부부야말로 진정으로 건강한 부부일 것이다.

부부의 성(性)도 마찬가지다.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고 몸도 불편한데도 상대방을 위해 억지로 섹스에 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성숙하고 건강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감정 및 신체 상태를 잘 파악한 후에 부드럽고 지혜로운 말로 파트너에게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배우자는 성숙한 파트너로부터 점차 존중, 신뢰와 사랑을 더 받게 마련이다. 자기 부부만이 알 수 있는 말을 비장의 무기처럼 미리 약속해 두었다가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안다면, 부부의 성생활이 훨씬 더 풍성해 질 것이다. 성은 사랑하는 부부의 즐거움과 생명을 위해(intended for pleasure and life) 존재한다. 부부 사이에 진솔하고도 지혜로운 표현을 전제로 한 성은 부부의 삶에 활력소를 제공한다. 어느 인간관계보다도 부부 관계에 정겨운 대화가 꼭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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