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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호

봉사와 욕심과 보상의 신자심리
  글·전요섭 (성결대 기독교상담학 교수. 한국복음주의 실천신학회장. )

봉사와 신자심리

교회의 기능 가운데 예배, 교육, 전도, 봉사 등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봉사로 섬기는 신자가 많을 때 교회는 성장, 발전하게 된다. 미국이 든든한 국가로 세워지는 데는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원봉사자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봉사자가 많아도 지도자인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 많고, 나태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봉사자의 다수보다는 변함없는 성격을 가지고 묵묵하게, 성실하게 봉사하는 소수가 오히려 낫다고 볼 수 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면 교인 가운데 어떤 사람과 함께 목회를 해나가고 싶을까? 대개 목회자들의 생각을 종합해 보면, 꾸준한 사람, 시종일관 변함이 없는 사람, 인내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떤 일이 생겼다고 해서 금방 동요된다든지, 금방 기분 좋아서 웃는가 싶더니, 또 인상을 찌푸리고 낙심 가운데 있는 이런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훌륭한 사람이 아닐 듯 싶고, 목회자가 볼 때에도 썩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성경은 신앙을 여러 가지로 비유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농사짓는 것, 집 짓는 것, 전투하는 것, 마라톤 경주를 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내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특히 마라톤은 이 가운데서 가장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다. 마라톤의 기술은 42.195Km 온 구간에 힘을 균등하게 안배할 줄 아는 것이다. 처음에 너무 무리해서도 안 되고, 초반에 힘을 축적하여 나중에 빨리 달리자고 해도 그것이 마음같이 되는 게 아니다. 가장 경기를 잘 하는 사람은 힘을 균등히 분배해서 완주하기까지 주변 사람이나 주변 상황에 요동함이 없이, 그리고 변함없이, 꾸준히 힘을 다 써버려야 된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에 봉사도 마찬가지이다. 봉사에 있어서 늘 꾸준하다는 것은 높이 평가받을만한 신앙이다. 신자들 가운데 “제가 이 교회에 25년 다녔습니다.” “제가 성가대만 15년 했습니다.” “제가 주일학교 교사만 23년 했습니다.” “제가 화장실 청소만 12년 했습니다.” 이 자체로 높이 평가받을만한 것이다. 바쁜 일이 많이 있었지만 꾸준히 성경 읽고, 기분 나쁠 때가 있었겠지만 꾸준히 기도하고, 속상한 일 많이 있었겠지만, 꾸준히 예배에 잘 참석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훌륭한 신앙이라고 평가해 봄 직하다. 그런데 적지 않은 신자들이 기분으로 봉사하거나 다른 사람의 눈에 인정받기 위해서 봉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이 있다. 이는 성경적이지도 못하여,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태도가 아니다.
성경에서 봉사의 모범을 보여준 사람을 꼽는다면 고린도전서에 소개된 스테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이 사람들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예수의 12사도도 아니었고,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고린도교회의 중직자나 지도자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교회의 방관자도 아니었고, 묵묵히 요동함이 없이 교회에 충성을 다했던 봉사자들임에 틀림없다. 특별히 스테바나는 그의 이름이 고린도전서의 제일 앞장 1장 16절에 처음 나오고, 제일 마지막장인 16장 15절에 각각 한 번씩 언급되었다. 처음과 나중에 그의 이름이 두 번 밖에 안 나온다. 1장에는 고린도교회의 첫 신자로서 바울이 세례를 준 세례자 명단에 그 이름이 나오는데, 사실 바울은 세례를 많이 준 사람이 아니었다. 불과 몇 명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었다. 고린도전서 16장을 다 읽기 전에는 어디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마감하면서 그의 이름을 빼놓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착실하고, 성실한 그리스도인이었는지 그의 이름을 꼭 한 번 부르고 고린도전서의 결론을 맺게 된다.
특히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스테바나는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지 않은 신자들은 섬김을 받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다. 대접을 못 받으면 서운해지고, 시험 들고, 낙심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의 봉사는 오직 다른 사람의 눈에 비쳐지기 위해서,  인정받으려는 목적으로 한 것이 틀림없다. 데마는 받고자 봉사했다가 마음의 충족을 얻지 못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가 버린 사람인지도 모른다. ‘봉사’나 ‘섬김’이라는 말은 모두 영어로 service라고 한다.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즉 예배이고, 좌우로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가식 없이, 말없이, 변함없이, 꾸준하게, 인내로써 성도를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봉사는 봉사의 행동 이전에 봉사의 마음이 중요한 것으로써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봉사이어야 한다.


욕심과 신자심리

이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떤 욕심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간됨을 평가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심리학에서 욕심을 중점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실존주의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이다. 그는 인간은 욕구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욕심을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 욕구라고 볼 수 있으므로 욕구나 욕심이나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도 문제는 없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욕심을 1차적 욕구 또는 생리적 욕구라고 표현했다. 이는 잘 먹는 것, 잘 자는 것, 좋은 집에서 사는 것 등 편안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욕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안정 또는 안전감을 얻고자 하는 욕심, 사랑받고 소속되고자 하는 욕심, 존중받고자 하는 욕심, 그리고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고 보았다.
아마 이 모든 것을 통괄하는 것은 결국 돈 욕심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돈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려고 노력한다. 신자들도 이에 예외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자신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은 해도 상당수의 신자들은 돈을 추구하려는 욕심이 그의 심리저변에 깔려있는 것 같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다!”라고 차마 말을 할 수 없을 뿐, 이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 어떤 신앙인은 자신의 신앙에 손상을 주면서, 또 대인관계의 단절과 피해를 겪으면서, 죽을 각오로 돈을 벌지만 막상 이 욕심이 채워지면 허탈할 뿐이다. 그래서 라틴속담에 재물은 소금물과 같다고 했다. 갈증이 난다고 하여 소금물을 마시면 갈증이 더 심해서 결국 큰 일을 당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욕심을 갖는 것은 어떤 일을 하게 되는 동기,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동기를 제공해 주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을 이루고 나면 별 것 없다는 것을 곧 느끼게 된다. 결혼하기 전이나 예쁜 여자하고 결혼 한 번 해보면 평생 소원이 없을 것 같고, 행복할 것 같지만, 아내가 예쁘다고 하여 행복이 남다른 것은 절대로 아니다. 돈을 많이 가지면 행복할 것 같지만 돈 많은 사람들은 그 돈을 지키려는 노력과 더 벌려는 집착, 욕심 때문에 삶이 비참해진다.
얼마만큼의 땅을 가져야 행복할 것 같은가? 유명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글에 “사람이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것이 있다. 러시아의 시골에 파흠이라는 농부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가난한 머슴살이 끝에 돈을 좀 벌어서 처자식이 먹고 살만한 땅을 사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볼가강 건너에 가면 땅 값이 싸다해서 그 곳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지나가는 어떤 사람이 파흠에게 “바시키르라는 곳에 가면 토지를 거저 주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7일 동안 걸어서 바시키르에 이르게 되었다. 만일 땅을 거저 준다면 지금 살고 있는 땅보다는 약간 넓은 땅을 얻을 생각이었다. 바시키르에서 그 땅 주인을 만나서 “땅 좀 얻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그 주인은 막대기를 하나 주면서 “해가 뜨면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해가 지기 전까지 줄을 그어서 갖고 싶은 만큼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반드시 기억할 것은 “해지기 전까지는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농부는 막대기를 땅에 대고 다리를 벌려 뒷걸음질을 해서 열심히 선을 그었다. 해가 지려고 하자 약속대로 원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상당히 많은 땅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너무 힘들어 하면서 목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버렸다. 그래서 그를 땅에 묻었는데 그것이 한 평이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라도 욕심을 갖게 되면 그 때부터 속물이 되고 비참해 지게 되는 것이다. 욕심이 있는 한 행복할 수 없고 욕심은 더 큰 욕심을 낳게 된다.
인생은 마치 어른들이 볼 때 아이들 의사놀이와 소꿉놀이 또는 땅 따먹기 같은 것이다. 욕심을 부리면서 땅을 많이 가져봐야 해 떨어지면 다 두고 집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또 인생은 마치 병정놀이 같아서 누가 높고 낮고 싸우고… 하지만 그것 역시 해 떨어지면 다 두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욕심을 쫓아다니며 헐떡거리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 인생이 되서는 안 될 것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늦기 전에 빨리 깨달아서 세속적인 욕심에 빠져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기보다는 거룩한 욕심, 의욕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하나님 앞에 칭찬들을 수 있을 것이다.

보상과 신자심리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 보상이 없을 때, 실망하고 낙심하게 된다. 적절한 보상이 생겼을 때는 보람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이다. 그러므로 보상을 기대하면 어떤 일을 할 때 그 태도와 자세가 달라 지게 된다. 심리학에서도 보상은 인간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동기로서 작용하는 것으로 보고 어떤 보상이 행동을 어떻게 유발시키는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이는 기독교신자라고 하여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보상을 바라게 되면 믿음이 자랄 수 없게 된다고 기록함으로써 일반적인 심리와는 다른 자세를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부분 신앙생활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실망하게 되고, 낙심되고, 좌절하게 되고, 상처받고, 섭섭해 하고, 시험 들게 되는 현상은 보상을 기다리는 심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법칙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기에 수고하여 뿌린 것을 이 땅에서 풍성함으로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이 땅에서의 보상이라기보다는 하나님나라에서의 보상이므로 마음이 조급하면 곧 실망하게 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은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누가복음 17장 5절에 의하면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했다. 이 질문의 답변으로 예수께서는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믿음을 더 해 달라고 했는데…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 믿음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종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답변하셨다. 즉 예수의 말씀은 매우 간단했다.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별 것 없고, 다만 철저하게 “나는 종이다!”하는 자기의식을 분명히 갖고 교회에서 봉사하게 되면 믿음이 자란다는 것이다.
종은 노예와 같은 자이다. 예수 당시에 종은 치욕적인 존재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노예제도가 없기 때문에 노예가 얼마나 치욕스러운가를 사실 이해하기가 어렵다. 과거에 상놈이라고 해서 종을 부리던 시대가 있기는 있었지만, 지금 피부로 느끼기는 어렵다. 미국은 1860년까지 노예가 있었지만,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켰다. 현재 민주국가에서 노예제도가 있는 나라는 많지 않을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항상 서두에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라고 말한 것은 수고하고 받을 생각하지 않겠다는 고백이다. 종이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시장하고, 피곤하고, 쉬고 싶지만… 주인이 “너는 음식 차리고, 내가 먹는 동안 수종을 들고, 심부름 한 다음에 먹으라!”고 하면 그렇게 해야 한다. 종은 이치를 따지거나 판단할 권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도 없다. 오히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여기서 ‘무익하다’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는 “아클레이오스”이다. “아”는 ‘없다’ ‘아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접두어이고, “클레이오스”는 ‘의무’라는 단어이다. 즉, 열심히 일하고 나서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지, 받아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라는 뜻이다. 이런 심리를 갖게 되면 절대로 교회에서 상처받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상처를 안 받으려면 당연히 사랑하고, 당연히 수고하고, 당연히 헌신하고, 당연히 봉사하고, 당연히 땀 흘리고 그 보상을 받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고 난 후, 받으려는 생각을 접으면 믿음이 커지게 된다는 것이 예수의 말씀이다. 만약 뭔가를 받으려는 마음,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들면 그 때부터 마음이 편치 않게 되고, 더 나아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될 수 있다.
종에게는 보상하거나 대접하거나, 종을 존경하는 법은 없다. 종은 죽도록 수고하고도 일한 것이 없다는 마음, 다른 사람을 돕고도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마음, 열심히 기도하고도 기도 많이 못했다는 마음, 소중한 재산을 헌금하고 더 많이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 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만 살아간다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아무런 불평, 실망, 낙망, 절망, 좌절, 상처 등이 없을 것이며,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결국 대접을 못 받아서 생기는 문제이다. 자기를 안 알아준다고 해서 상처받는 것이다. 종의 마음은 기대하지 않는 마음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상처받을 것도 없다. 종과 같은 마음속에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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