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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호

어떤 이별
  글·최원현 (수필가. 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강남문인협회 회장. 청운교회 )
천리향도 떠나보냈다. 다행히 꽃을 좋아하는 문우에게로 갔으니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겨울의 끝 차가움 속에서도 우리 집에 제일 먼저 하얀 꽃으로 봄소식을 알려왔었다. 그래서 사랑하던 꽃이다. 화려하게 이쁘진 않지만 향기가 멀리까지 간다하여 천리향이라는데 5년이나 같이 산 것을 떠나보내게 된 것이다. 그런 천리향까지 보냈으니 작은 집으로 옮긴다며 내 체취 묻은 다른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이 떠나보냈겠는가. 마음이 찢기듯 아프다. 슬프다기보다 고통이다. 내가 사랑할 가족은 철들기 전에 잃어버렸었다. 잃는 아픔도 모를 때였다. 그런데 이제는 떠나보내는 아픔을 이리 많이 겪고 있다.
책장 앞에 선다. 정말 미안하다. 이렇게 너희들을 보낼 수밖에 없는 가슴이 이리 아픈 것을 보면 그 사이 더 정이 들었나보다.
인연이란 우연처럼 자연스레 다가오는 거라고들 하지만 너와의 인연은 내가 만들었지 싶다. 헌 책방 구석 바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너를 만났었지. 오랜 세월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너를 보는 순간 반가운 마음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기쁘고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걸 누르고 내색을 않은 채 먼지를 털어 별로 필요치도 않은 다른 책 몇 권과 함께 계산을 하고 집으로 데려왔었다.
너무 낡아 책장을 넘기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지만 난 그런 너를 만난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뻤고 기분이 좋았다. 오래된 책을 갖고 싶다는 소망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너는 나와 이십오 년을 같이 살았다. 하지만 내게 너는 너무 높은 존재였고 해서 네 지식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도 넌 내게 소중한 존재였다. 하긴 내 책장엔 너 같은 친구도 몇 된다. 거기에 필요해서 구입하는 책과 매달 보내져 오는 문학지며 필자 증정본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네가 있는 집엔 쉼 없이 책들이 늘어났고 자연 오래된 책들은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 사이 세월의 흔적으로 펼쳐볼 수도 없게 낡고 헤져버린 것도 생겼다.
어느덧 나의 글쓰기도 30년이다. 그동안 수많은 책들과 만나고 사랑을 했다. 행복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랑하는 것도 욕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사랑이 변하거나 식은 건 아니다. 하지만 가장 환경의 지배를 많이 받는 것도 인간인가 보다.
25년을 살던 집이 헐리게 되니 이사를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책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냥 버리면 바로 생명이 끝나버릴 수 있다고 생각되어 굳이 헌책방을 수소문해 보내주기도 했지만 내게는 소중한 것도 다른 눈엔 그렇지 않은지 거부당하기도 했다. 그때 헤어진 친구도 천 권이 넘는다.
헐린 집이 5년만에야 완성되어 다시 들어왔는데 그 과정에서도 천여 권의 책들과 또 헤어졌다. 그런데 그런 아픈 가슴으로 안고 품고 왔던 책들을 책장에 꽂다보니 공간이 또 모자란다. 사흘을 그들과 어떻게든 함께 살아볼 양으로 온갖 궁리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내 그런 노력에도 현실은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며 냉정하게 외면을 한다.
해서 난 지금 내 일생에서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결정을 하고 있다. 내 책장의 한도가 3천권이니 남길 것만 선별하는 것이다.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나는 지금 어지럽게 놓인 책들 한 가운데 참담한 마음으로 멍청하게 앉아 있다. 눈에 보이는 책들에서 함께 있고 싶다고, 제발 보내지만 말아달라고 애원도 못 하고 눈물만 그렁한 채 나를 쳐다보는 눈빛을 피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 그래도 그들을 구제할 방법이 없다.
결론은 친필 사인을 하여 보내온 책들은 무조건 남겨둔다. 둘째 비교적 자주 보는 책들은 남긴다. 셋째 문학잡지는 내 글이 실려 있는 것만 남겨 둔다. 그러나 그 작업이라고 또 어디 쉽겠는가. 한 권, 한 권 목차를 펼쳐 내 이름의 글을 찾아보며 남길 것인가 버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더디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쥔 내 손이 오른쪽으로냐 왼쪽으로냐에 따라 운명이 갈리는 저들에겐 참으로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저들의 이 길 또한 운명인 것 같다. 해서 이쯤에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다. 너무 서운해 말았으면 싶다. 이곳에 남는 친구들도 머잖아 그대들 뒤를 따를 것이고 그대들을 보내는 나 또한 시간이 가면 빈 손으로 떠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히려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며 보내는 내가 있을 때 가는 그대들이 그나마 덜 외롭고 오히려 행복한 이별이 되지 않겠나 싶다.
고맙다. 그대들로 하여 행복했다. 그대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결코 잊지 않겠다. 이제 자네들은 내가 맛보았던 그런 설렘과 감격 속에 헌 책방에서 새 주인을 만나기도 할 것이고, 더러는 재활용이란 이름의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다. 사람은 한 번 가면 끝이지만 자네들은 이렇게 헤어진 나와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또 다른 인연의 희망도 가져 본다.
그간의 사랑에 감사한다. 그리고 더 오래 아니 나의 마지막까지 함께하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그대들을 보내는 안타까움과 슬픔은 내게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의 상처로 향기로운 흔적이 되어 남을 거다. 사랑했다. 고마웠다.
향긋 꽃냄새가 봄 향기로 스며든다. 문우가 가져간 천리향의 향기일까. 아니다. 내 책들에 묻어있던, 떠나간 그들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남기고 간 체취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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