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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호

감사를 잊은 세대
  글··김 윤 (매그너스병원장. 본지 편집자문위원. 영락교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아마 어린 시절 유년 주일학교에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구절은 매우 낯익은 성구 중 하나이리라 생각이 된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외우기만 했었는데 점점 자라면서 가끔 이 구절이 떠오를 때면 현실적으로는 좀 모순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면서 현실적으로는 맞지 않는 표현이라고 혼자 마음속으로 어느 틈엔가 결론을 내리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구절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잊고 있었던 “범사에 감사하라”는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무슨 뜻일까?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떠한 일을 당하든지 감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능할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삶 속에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능할 것인가? 감사에 조건이 필요한가? 예수님의 감사 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오래전 읽었던 손양원 목사님의 일생을 소재로 한 책인 “사랑의 원자탄”이 생각났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읽었는데 새삼 지금 그때 상황이 떠오른다. 몇 년 전 여수에 있는 애양원에 다녀왔다. 그곳에는 손양원 목사님의 삶의 흔적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자기 아들을 살해한 청년을 용서하고 그 청년을 다시 자신의 아들로 삼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그분의 신앙의 경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때는 막연히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도 있구나 하는 단순한 생각을 하고 지나갔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감히 상상도 못할 일임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어릴 때 듣던 글 가운에 이런 시조가 있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 같은 가없은 은혜 어디대어 갚사오리?”라는 시구인데, 왜 갑자기 이런 구절이 떠오르는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날 낳아주신 사실 자체만 가지고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노래하던 사회가 오늘날에는 “어머님 왜 날 낳으셨나요?”하는 원망의 가사로 변화된 사회가 되어버렸다.
세상이 변했다. 생활방식이 변하고 사고방식이 변하고 인간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다. 지구가 하나의 생활권 안에서 이야기하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세계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중심이 되는 화두는 경제가 되었고 모든 국제간의 대화는 정치, 군사, 문화, 학문, 예술, 심지어 종교까지 경제 우선의 정책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현대 사회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하고 첫째가는 가치가 경제에 있다는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고 가르치고 있어서 둘 중에 하나의 선택을 요구한다. 재물의 속성은 절대로 만족을 모른다. 그렇기에 경제 중심의 사상에서는 감사의 마음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감사의 조건이 무엇이 있을까? 아니 조건이 필요한 것인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부모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시작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요즈음 매스컴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신의 태어난 환경을 가지고 금수저니 은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사고의 흐름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의사인 입장에서 필자의 경험을 미루어 보더라도 과거에 비해 요즘은 감사가 실종된 시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필자가 물불가리지 않고 일하던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중환자나 수술 후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치료 도중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를 당하게 될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런 경우 대개는 그동안 선생님들 수고했다고 감사 인사를 하거나 아니면 장례 등 모든 절차가 끝난 후 찾아와서 감사의 표시를 하거나 아니면 식사에 같이 초대해서 생전의 돌아가신 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서로 위로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른 요즈음의 의료 환경을 볼 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겠지만 서글픈 마음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경제 우선이라는 시대의 변환과 감사의 실종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감사라는 말도 “사랑”이라는 말만큼 낭비(?)되는 언어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구태여 상업적인 상투적 표현의 감사라는 말을 제외하더라도 의례적인, 상식적인, 예의적인, 의무적인 감사라는 단어 표현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라고 간주하자. 그러면 진정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는 감사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이러한 사회에서 진정 감사라는 단어가 의미 있는 것인가? 더구나 성경에서 말하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뜻은 아무 의미가 없는 단순한 표현뿐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경제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최선의 가치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진정 순수한 의미에서 감사라는 표현은 불가능할 것 같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마 6:24, 눅 16:13) 가르치고 있으며 재물의 속성은 결코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감사라는 감정이 차지할 마음의 여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하는 이러한 감사의 기도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감사는 감사의 조건이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이유가 없어도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확실한 범사에 감사해야 할 조건을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직접 병든 몸을 치유시키고 굶주린 허기를 해결해주신 인간들로부터 감사가 아니라 오히려 배신을 당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에서 고통과 모욕을 당하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어 주시기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다. 그 사랑의 은혜를 우리는 빚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범사에 감사할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살고 있기에 이 시대가 요구하는 중요한 가치의 흐름인 경제 우선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즈음 정치인들이 가장 목소리 높이는 구호가 있다. “민생 살리기”라는 구호다. 물론 필요한 내용이고 중요한 구호다. 그러나 “민생 살리기”라는 구호의 바탕이 재물을 우선의 가치로 선택하는 데 있다면 성경은 분명히 경고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그리고 선택을 하라고 말이다. 재물을 우선의 가치로 선택한 삶에서는 감사라는 단어는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감사를 잃어버린 이 시대에 교회에서만이라도 진정한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오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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