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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호

손해 보는 아이
  글·유한익 (서울우리아이마음클리닉 원장. 남포교회 )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상현이 엄마는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상현이는 좀 모자란 아이 같아요. 뭐든 양보만 해요. 속상해 미치겠어요!” “친구들이 좋은 것을 다 차지했는데도 화나지도 않나 봐요! 매일 손해만 보고도 뭐가 좋은지 늘 헤헤거려요.” 유치원에 다니는 수정이 아빠의 넋두리도 비슷하다. “짝꿍이 매일 괴롭히고 놀리는데도 뭐가 좋다고 그 아이만 쫓아다녀요. 한 번은 얼굴이 할퀴어져서 왔길래, 너무 화가 나서 “아빠가 다 책임질 테니 너도 얼굴을 잔뜩 할퀴어 놔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말하면 뭐해요. 때리지도 못할 텐데. 아이고 답답해라!”
유달리 주변 아이들에게 손해를 자주 보는 아이들이 있다. 보고 있는 부모는 미칠 노릇이다. 어디서 맞고 들어오는 것보다 때리고 오는 게 덜 속상한 것이 부모의 솔직한 마음이다. 얼마 전 방송에서 ‘자식이 군대에 가서 선임으로부터 이유 없이 심한 욕설을 듣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어머니가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요즘은 학교든 군대든 심지어 자식의 직장까지 쫓아가서 난리를 치는 부모들이 있다는 소식도 간혹 들린다. 오매불망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이가 남으로부터 억울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기란 참으로 속상한 일이다. 
“난 우리 아이를 강하게 키우고 싶어요. 그 정도는 이겨 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누군가에게 맞고 오거나 놀림을 당해서 울고 있는 아이를 앞에 두고 “넌 왜 맞고 들어오니 바보야? 너는 주먹이 없어? 너도 때려!” “그렇게 심약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래?” 이렇게 말하는 부모도 종종 봤다. 하지만 이런 말이야말로 아이를 ‘두 번 죽이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속상해서 그렇지’라고 어른들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집에서도 욕먹는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아이는 도대체 어디에 가서 자신의 마음을 이해 받을 수 있을까? 
늘 당하고 오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반응은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속상한 마음에 자신의 아이를 다그치는 경우가 생각보다 참 많다. 하지만 그 중에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구체적인 행동은 하지도 않으면서 모두 아이 탓으로 책임을 돌리는 부모들이 있다. 필자는 ‘직무유기형’이라고 칭하고 싶다. “네가 어떻게 했기에 다른 애들이 그렇게 대하느냐? 넌 바보 같이 뭐했냐? 넌 입도 없고 생각도 없냐?”는 식의 비난을 퍼붓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종종 ‘아이들 일은 자기들이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옳다, 자꾸 도와주면 더 약해진다’는 논리가 기저에 깔려있다. 모두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부모는 어떤 구체적인 지원을 하고 있는지에 있다. 실제적인 도움은 주지 않으면서 말만 하고 아이만 탓하는 부모는 전쟁터에 신참 부하를 총알받이로 밀어내고 자신은 뒷짐 지고 뒤에 숨어 있는 비겁한 지휘관과 같다. 둘째는 놀라거나 화가 난 부모가 직접 뛰어드는 유형이다. 일이 생기면 당장 쫓아가서 부모가 직접 상황을 정리한다. “일단 엄마에게 다 말해. 엄마가 다 해결해줄게!”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겠다는 생각, 든든하게 지지해줘야겠다는 강한 의욕은 참 좋다. 문제는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있다. 아이의 숙제를 부모가 대신 해주는 격이 된다. 아이는 부모 뒤에 숨어 있기만 하면 된다. ‘과잉보호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듯싶다. “애들은 다 그런 거야. 그냥 기다리면 돼. 크면 다 좋아져.”라고 말하며, 지금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 ‘무한긍정형’도 있다. 그럴듯하지만, 부모자신이 갈등을 마주할 자신감이 없거나 무기력할 때, 이런 근거 없는 낙관주의로 포장될 수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또는 아이가 맞고 오면 바로 태권도장에 보내는 식,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힘을 키워서 나중에 다 갚아줘야 한다는 심기일전 ‘복수형’도 있다. 어려움을 자신의 발전 기회로 삼고, 분노나 억울함을 스스로를 갈고 닦는 원동력으로 재활용한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힘이나 실력이 부족해 이런 일이 생긴 것 아니냐?’는 식의 너무 단순한 인과공식에 휘둘리는 느낌이 든다. 과연 모든 손해는 능력이 부족해서 오는 것일까? 그렇다면 능력만 있으면 손해를 안 본다는 말인데, 세상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꽤 능력 있는 사람이 아주 열심히 일했는데도 결국 손해를 보는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 허다하게 일어난다.
손해 봤다고 울며 억울해하는 아이에게 어떤 개입을 하기 전에 몇 가지 고민해봐야 할 것들이 있다. 먼저, ‘승자논리’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손해 본 아이가 무엇이 부족했거나 잘못했기 때문에 손해를 본 것이라는 신념인데, 이런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경우가 생각보다 아주 흔하다. 이런 관점이 있으면, ‘우리 아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 단순하게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약하든 강하든 간에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문제이고 원인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가해자가 더 큰 문제지, 피해자가 약한 것이 핵심은 아니다. 학교폭력이든 데이트폭력이든 가정폭력이든 피해자가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제대로 다루는 것이 더 근본적인 접근이다. 울며 뛰어들어온 아이에게 한마디 하기 전에 이 사실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더 나아가 ‘지금 손해를 보는 것’과 ‘이기고 지는 것’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니 손해를 보는 것이 오히려 큰 이익이 되는 경우가 참 많다. 특히 자주 만나는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이런 역전이 더 많이 일어난다. 우리에게는 좀 더 장기적인 안목과 여유가 필요하다. 초반에 뒤처졌다고 해서 게임이 끝난 것이 아니다. ‘The last laughter is the best laughter.’ 인생은 마라톤이다.
많은 이들이 ‘비폭력의 힘’을 믿고 실천해왔다. 그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다. 비폭력의 힘은 손해 보는 힘이다. 자발적으로 손해를 봄으로써 다른 이를 부끄럽게 만드는 힘이다.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바꾼다. 양심이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기적과 다름없으며, 자기 스스로 변화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니 사람을 바꾸는 데는 폭력보다 비폭력이 더 효과적인 셈이다. 폭력과 강압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변화만 일으킬 뿐이고, 부작용은 말도 못할 정도로 심각하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손해를 봄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훈련과 경험이 우리와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하다. 단지 ‘손해를 봤다’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분노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손해 보는 실천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문제를 푸는 더 강력한 해법임을 삶을 통해 체득하고 그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격려해야 한다. 부모가 먼저 가정에서 본을 보여야 한다. 과일을 먹을 때, 치킨을 먹을 때, 가족 모두 앞 다투어 양보해보자. 맨 마지막에 제일 먹기 좋은 부분이 남고, 상대가 먹기를 기대하며 서로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자. 자발적 손해, 적극적 배려로 피해의식을 극복하자. 이것이 진정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다(로마서 12장 21절). 얻어 내고 빼앗고 차지하는 싸움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미덕을 통해 감동을 주는 아이들로 키워내자. 우리 자녀는 감동으로 사람을 바꾸고, 결국 세상을 바꾸는 작지만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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