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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호

모든 죽음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글·김재욱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저서 ‘내가 왜 믿어야 하죠?’ ‘1318 창조과학 A to Z‘ 등)

얼마 전 무척 가까운 어릴 적 친구의 장인어른이 돌아가셔서 갑작스럽게 조금 먼 길을 다녀왔다. 친구가 작년에 장인을 서울의 큰 병원에 모시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모두들 지병이었으려니 했지만 의외로 사고사였다.
농사일 때문에 트럭을 몰다가 논밭이 있는 쪽으로 빠져 차가 왼쪽으로 넘어지게 됐는데, 조수석에 두었던 무거운 기계가 몸을 눌러 숨을 거두신 것이었다. 당연히 가족들은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사고처리와 장례를 함께 준비해야 했다.
더욱 아쉬운 것은 곧 생신이라 이번 주에 온 가족이 만나 식사를 하기로 약속까지 잡아 둔 상태여서 가장 사랑받던 막내딸인 친구의 부인은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라도 했다면 아쉬움 속에서나마 작은 위안이 될 텐데 평생 마음에 응어리로 남게 되었다.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의 삶과 죽음의 과정을 들어보면 참 안타까운 이야기도 많다. 그래서 모든 죽음에는 아이러니가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아무런 사연이 없는 죽음은 없다.
아이러니(irony)는 반어적 표현으로 원래 하고자 하는 말을 강조하는 것이다. 역설(paradox)적인 상황을 아이러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죽음에는 반어적 슬픔의 메시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암 발병 한 달 반 만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는 30분을 못 기다리고 병원에서 급히 달려오는 내 첫아이를 못 보고 가셨다. 내 할아버지는 88세 생일날 아침에 돌아가셨다.
새 생명 탄생의 기쁨과 겹치는 죽음, 자신의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날에 맞이하는 죽음, 가족들과의 화목한 만남을 앞두고 삶을 지탱해주던 농기계의 반격에 의한 죽음… 생명과 사망, 탄생과 소멸, 만남과 이별… 이 모두가 반어적 역설이 아닌가. 그렇게 모순처럼 느껴지는 사연으로 인해 우리는 먼저 간 고인을 잘 잊지 못 하게 된다.

이런 역설이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단지 인간사가 복잡하기 때문인가? 우연의 일치만으로는 설명이 잘 안 되는 이런 현상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물이나 기타 생명체에는 이런 것이 없다. 기억해줄 남은 자도 없고 그 삶을 언어나 글로 기록할 능력도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때로 의미가 부여되는 동물도 인간의 삶이 연결돼 있기 때문일 뿐 큰 가치는 없다.
사람은 진화의 산물도, 우연히 있게 된 존재도 아니다. 무엇 하나 우연으로 가능하지 않은데 우연히 왔다가 아무 의미 없이 간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속으면 안 된다. 세상 이치와 법칙이 모두 그저 생긴 일들이라는 것을 믿는다니 놀라울 뿐이다.
고인의 아이러니는 죽음 뒤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마음에 남을 이유가 없는 것들이 많다. 죽음 후에는 소멸만이 있어서, 단지 이 땅에서 더 함께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오는 아쉬움이라면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에 적응하고 포기하는 방식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다른 모든 동물들처럼 말이다.

죽음의 역설에는 아직 못다 한 거대한 이야기가 물밑에 가라앉아 있다. 죽음 뒤의 삶이 있고, 행복한 천국에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지금의 아쉬움은 곱절의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남에 필요한 전제는 고인이 먼저 그런 좋은 곳에 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남은 자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편 고인이 지옥에 간다 해도 남은 자들만은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랄 것이다. 고인이 남은 자들을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가령 내가 그 땅에 역병을 보내고 피 속에서 내 격노를 그 위에 쏟아 부어 사람과 짐승을 그곳에서 끊는다 하자.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그 안에 있다 할지라도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이 아들딸은 건지지 못하고 오직 자기 의로 자기 혼만 건지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겔 14:19-20)

사람은 제아무리 구원받은 자라도 하나님께 얻은 자신의 의로움으로 자기 혼만을 건질 뿐이다. 그래서 고인들이 남기는 메시지는 남은 자들이 각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영원한 삶의 길을 찾고 결론을 얻으라는 의미가 아닐까? 물론 사람은 자기 죽음의 때를 알 수 없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육신의 장막을 벗는 이들에게 마지막 발언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그들도 역설적으로 각자 이 세상의 상황과는 반대의 장소로 간다. 거지는 낙원으로, 부자는 고통 받는 지옥으로… 그래서 삶 자체가 역설이고, 하나님의 진리 자체가 반어적이다. 낮아지면 높임을 받고, 드리면 풍성해지고, 사랑을 줄수록 더 많아지고, 밀알이 죽으면 열매를 맺는다.
아이러니는 반어(反語)이고 역설(逆說)이다. 말 어(語), 말 설(說)… 우리 식으로는 ‘말’이다. 어떤 메시지라는 것이다. 고인이 남긴 역설적 이야기 뒤에는 그들이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지만 그들은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남아 계속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내게 다섯 형제가 있사오니 그가 그들에게 증언하여 그들 또한 이 고통 받는 장소로 오지 않게 하소서… (눅 16:28)

이제 네 젊은 시절에 네 창조자를 기억하라. 곧 재난의 날들이 이르기 전에 혹은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 해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하는 그런 해들이 가까이 이르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혹은 비가 온 뒤에 구름들이 되돌아오기 전에 기억하라. (전 12:1-2)

내가 알거니와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고 또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시리라. 내 살갗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19: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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