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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호

아빠! 힘내세요!
  글·유한익 (서울우리아이마음클리닉 원장. 남포교회)

공부만 소홀히 하는 정도가 아니다. 게임 하느라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는다. 정작 학교 갈 시간이 되면 피곤 때문에 눈을 뜨지도 못한다. 매일 아침마다 학교 보내려고 실랑이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엄마는 아침 해가 뜰 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다. 중3 기훈이가 본격적으로 엄마 속을 썩이기 시작한 것은 1년 전 아버지가 지방으로 발령을 받은 이후부터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만 집에 오실 수 있어서 아버지는 이런 아들의 행동을 직접 개입하실 수 없다. 가족 모두 이사를 가자는 아버지의 뜻에 반대한 것은 바로 엄마. 이유는 교육 때문이었다. “지방보다는 서울이 아이 교육시키기에 더 좋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시자 아이는 자기 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공부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생활조차 힘들어졌다. 지각과 무단결석으로 벌점은 산더미처럼 쌓여가는데, 평소 걱정이 많고 유약한 성격인 엄마로서는 고집 센 사춘기 아들을 도대체 다룰 방도가 없다.

저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아버지가 떨어져 있는 가정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물론 어머니가 아버지의 빈 공간을 충분히 채워주고 있다면 괜찮겠지만, 솔직히 자녀들 특히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행동문제를 어머니 혼자서 다루기는 쉽지 않다. 보통 아버지가 예민해진 사춘기 딸내미를 대하기 만만치 않은 것처럼 말이다.

요즘 아버지들이 잃어버린 힘은 무엇일까? “아빠가 집에 있으니까 애들이 말을 잘 들어서 편해요!”라는 아내의 말은 단지 아버지는 손쉽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만을 품고 있을까? 물론 아버지는 전통적으로 권위와 통제의 아이콘이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조금은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며, 때로는 이것이 지나쳐 억압적이고 일방적인 관계의 중심에 아버지가 서 있을 수도 있다. 권위주의적인(authoritarian) 것과 권위 있는(authorative) 것은 분명 다르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먼저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양육은 적절하고 건강한 권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다. 부모자녀간은 친구처럼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물론 단지 통제하고 명령하고 복종시키는 독재적인 권위 즉 권위주의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방적인 권위주의로는 자녀를 통제할 수 없다. 아버지가 그 자리에 없거나 자녀가 나이를 먹으면 권위주의는 힘을 잃는다. 통제는커녕 오히려 반항과 단절을 야기한다. 기껏해야 수동적인 복종, 거짓되고 형식적인 순응이 이루어질 뿐이다. 인간은 절대 또 다른 인간을 눌러서 가둬놓을 수 없다. 자유를 향한 인간의 끝없는 투쟁과 의지는 역사를 통해 명백히 반복적으로 증명되고 있으며, 자녀는 결국 부모로부터 독립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그것보다는 훨씬 크고 깊다. 아버지의 권위는 그저 자신의 말을 듣게 하려는 힘 싸움, 파워게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녀를 향한 깊은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는 권위다. 아버지는 단연코 사랑의 화신이어야 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세밀하게 보살펴주는 희생적인 사랑이라면 아버지의 사랑은 끝까지 책임지는 믿음직한 사랑이다. 이 사랑만이 아버지의 권위를 지켜주는 유일한 길이다. 필자는 요즘 아버지들이 이 묵직하고 진한 사랑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지 않은지 걱정이 된다.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해지고 안전한 성벽 속에서 보호받고 있는 듯한 그런 믿음, 단단한 신뢰를 느끼고 누리고 있는가? 아버지(父)는 도끼를 들고 가족을 지키며 책임지는 존재 아닌가?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 아버지는 그 사랑의 힘을 잃지 말아야 한다.

결혼을 해서 자녀를 키워 나가는 한 명의 남자에게 가장 큰 도전이 무엇일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총각 때와는 달리 이제는 한 가정을 책임지고 꾸려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엄청난 지각변동이다.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던 사랑의 벡터가 배우자나 자녀에게로 급선회해야 한다. 개인에서 가정이라는 공동체로 사랑의 대상이 확대되고, 단지 ‘함께’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무한책임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가장(家長)은 위상이 높아진 것이 아니라 가족에게 봉사해야 하는 종의 위치가 되는 것이다. 나는 진정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가? 나와 생각과 습관이 다르고 때로는 나를 아프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도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가? 무한히 아니 거의 무한히 단 한 명만이라도 사랑을 놓지 않을 수 있는가?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틀 안에 머물러 있다면 진정한 아버지로서 존재감은 아직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가정은 아버지인 내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 내 사랑이 얼마나 부족하고 이기적인 것인지를 매일 깨닫고 배우게 해주는 최고의 학교다. 동시에 그 부족한 사랑을 자라게 해주는 옥토며, 강력하게 하고 오래 견디도록 조련해주는 훈련장이다.

가족이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뜻만 고집스럽게 주장해서는 곤란하다. 오해하지 말라. 무조건 아내나 아이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데로 다 들어주라는 말이 아니다. 왔다 갔다 부화뇌동(附和雷同)하라는 말은 더욱 아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나 자신이 아닌 다른 가족을 위한 결정인지를 늘 되돌아보라는 이야기다. 자녀에게 필요하다면 때로는 엄격하고 단호하게 금지시켜야 할 때도 있다. 허락하는 것보다 자녀의 강한 요구와 눈물을 거절하는 것이 더 힘들고 더 큰 사랑과 신념을 필요로 한다. 책임 있는 아버지는 자녀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고 될 때까지 시도한다. 하지만 그 시도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남을 위한 고집은 사랑이고 자신을 위한 고집은 집착이다. 자녀와 뜻이 다를 때 하늘을 우러러 자신의 생각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고민하고 기도해야 한다. 책임 있는 사랑을 가진 아버지는 한 번 말하기 위해 백 번을 생각한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과 실천만이 사랑이다. 가장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은 시간으로 계량될 수 있다. 가족을 위해 사용하는 시간의 양, 그것은 기막히게 사랑의 크기와 비례한다. 자녀를 생각하고 기도하고 고민하고 실제로 함께 하는 시간만큼 우리는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2013년에 개봉된 《어바웃타임》은 아버지에 대한 영화이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해변가 집에서 매일 차를 마시고 해변을 거닐고 아들과 탁구를 치며 하루를 보낸다. 영화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이 아버지는 시간을 거꾸로 돌아갈 수 있는 재주가 있다. 시간을 여러 번 거슬러가면서 아버지가 깨달은 것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이었다. 자녀와 함께 보낸 시간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사랑 자체이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사랑, 성육신(成肉身)이 바로 우리 옆에 와 함께 시간을 보낸 창조주의 행동 아닌가?

자녀가 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 자신의 아버지가 떠오른다면 그보다 더 가슴 벅찬 일이 있을까? 자녀들이 조물주의 사랑을 지금의 아바 아버지를 통해 힘들고 고단한 현실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인 내가 오늘 또 결심하고,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당부하고 기대한다. 아버지들이여! 사랑하는 존재 그 자체로 빛나라!

(ps. 처음에는 힘든 아버지들을 위로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글을 쓰다 보니 어깨에 짐을 하나 더 씌워드린 것 같다. 아버지는 고단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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