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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호

5. 배재학당과 우리나라 감리교회의 첫 예배
  글·조임생 (동화작가. 시인. 여의도순복음교회)

입국 초기 한국 정부는 기독교 포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아펜젤러는 간접적이면서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교육 사업을 펼친 것이다.
1985년, 아펜젤러는 스크랜턴의 집 한 채를 빌려 두 칸짜리 방의 벽을 헐고 작은 교실을 만들었다. 그해 두 명의 학생이 수업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조선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근대학교의 시초이다. 1986년에 학생이 16명으로 늘자 정동에 있는 민가를 사서 교실로 개축하여 사용하였다.
1987년 2월21일이었다.
외무부의 서기요 통역관인 김 씨가 찾아왔다. 그는 커다란 한자로 ‘배재학당’이라 쓰인 현판을 들고 왔다.
“선교사님, 기뻐하십시오. 국왕께서 학교 이름을 내리셨습니다.”
“오오, 그래요? 학교이름이 무엇입니까?”
“‘배재’입니다. 유능한 인재를 기른다는 의미이지요.”
“하하하, ‘배재’라……. 뜻이 참 좋습니다. 드디어 우리 학교가 정부의 허가를 받았군요.”
“이제 ‘배재’는 공립학교가 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아펜젤러는 몹시 기뻐하였다.
이제 국가에서 인정한 공립학교가 된 것이다. 드디어 조선인들 앞에서 설 자리를 얻은 것이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이것은 배재학당의 교훈이다. 기독교 정신이 깃든 이 교훈은 지금까지 배재학교의 교훈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처음 이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은 영어를 배워  출세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단순한 지식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과 신앙 훈련에도 충실하고자 했다.
1887년 7월 24일엔 최초의 감리교인 박중상에게 세례를 베풀고, 10월2일엔 두 번째 감리교인인 한용경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들은 배재학당 학생들이었다. 이 무렵 최 씨 성을 가진 부인들도 세례를 받았다. 이들에게 세례를 줄 때 아펜젤러는 한글로 된 세례예식서를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중등과정의 보통과와 대학과정의 본과를 두고 한문·영어·만국지지 등을 가르쳤다. 신앙적인 바탕 위에서 학문적으로도 훌륭한 교육기관을 만들겠다는 아펜젤러의 꿈은 컸다.
1887년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르네상스식 벽돌건물을 지어 본격적인 학교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후 ‘배재학당’은 발전을 거듭하였다. 이 학교는  새로운 지식에 목마른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워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1887년 10월 9일 오후,
벧엘 예배당(지금의 정동교회)은 감격과 설렘으로 가득했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며 아펜젤러가 성경공부를 위해 사둔 집이었다. 이날 처음으로 한국인만을 위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교인들은 사방 8자 되는 방에 모여 앉았다. 아펜젤러는 이 모임이 하나님의 나라에 유용하게 사용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를 한 뒤 그들은 마가복음 1장을 읽었다.
이날의 예배 모임은 ‘한국 감리교회의 첫 예배’, ‘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공중예배’인 동시에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첫 예배’가 되는 것이다.
일주일 후인 10월 23일에는 ‘벧엘 예배당’에서 성찬예식을 가졌다.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예식이었다. 이때 회중은 ‘우리의 기도문’을 사용했으며 모두 경건하고 진지한 분위기였다. 성찬예식을 거행한 감격을 아펜젤러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이렇게 생명의 떡을 이 백성에게 떼어 주다니, 오! 얼마나 큰 은혜인가! 감사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 떡을 먹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일날 교회에서 설교 할 때의 아펜젤러는 언제나 옷을 단정히 입고 예배엔 정성을 다하였다. 교인들과의 대화에서도 항상 예의범절을 갖추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나 공휴일, 소풍 가는 날은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놀아주었다. 그는 교제하고 있는 조선 사람의 가정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슬픈 일이 닥치면 함께 슬퍼하였다.
 교회 성도는 곧 200명으로 늘어났다.
“목사님, 예배당을 새로 지어야 되겠습니다. 앉을 자리도 없어요.”
조선 기독교인들 역시 건축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1895년 9월 예배당 정초식이 있었다. 고위 관리들이 참석하고, 많은 성도들이 모였다. 아펜젤러는 그날의 감격을 닥터 스크랜턴에게 편지를 보내 전했다.

이것은 우리 교회사에 일어난 위대한 사건입니다. ‘배재학당’에서 온 남학생들과‘이화학당’에서 온 여학생들이 처음으로 함께 모여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습니다. 동시에 같은 기념사도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35년 후에는 이 주변에 몇 채의 높은 양옥들이 세워지고, 우리 ‘벧엘 예배당’에는 몇 백 명 내지 천여 명의 신도들이 모여 예배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북 감리교회가 합석하는 자리가 되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의 편지 내용과 같이 당시의 예배는 조선에서 뿌리 깊은 신분 차별과 남녀 차별을 타파하는 새로운 빛이었다. 양반과 천민이, 남자와 여자가 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시대였다. 남녀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써 조선의 낡은 봉건적 사고는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예배당이 완공되었다. ‘정동예배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이었다. 예배당 안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 역시 조선 최초의 것이었다. 처음 듣는 오르간 소리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예배당은 금세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완공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펜젤러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아직 건물을 바라보지 말라. 실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건물을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감리교가 아침의 나라에서 꽃피게 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야망이란 이 나라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영혼을 구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유일하고 위대한 일이다.
주님, 제가  이 조선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만 전파하도록 도와주소서.

이 예배당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 최대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1914년의 대부흥 운동으로 교인수가 2천명 이상으로 늘어나자 1926년 모퉁이 주춧돌을 종각 남쪽 모퉁이 서편으로 옮기고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87년과 1888년 사이에 아펜젤러는 감리교회 선교사인 존스와 함께 조랑말을 타고 북부지역에 전도여행을 떠났다.
마침 가을이었다. 벼이삭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길섶엔 보랏빛 들국화가 피었다. 그들은 들판을 지나고, 단풍이 불타는 계곡을 건너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날씨가 좋은 날은 풀밭에 간이침대를 놓고 잤는데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지고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아펜젤러는 간이침대에 다리를 쭉 펴며 말했다.
“존스 목사님, 여관에서 잘 때 보다 훨씬 좋은데요? 여관방은 천장이 낮아서  제 몸을 구부려야 하거든요.”
“아펜젤러, 조선의 여관에서 당신처럼 키가 큰 손님을 맞이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하하하.”
 “하긴 조선 사람들처럼 나도 키가 작았으면  할 때가 있어요.”
“빈대나 벼룩이 뜯어먹기엔 키가 큰 당신이 좋을 거요.”
“존스 목사님, 빈대 벼룩 이야기하면 정말 끔찍합니다. 서까래나 바닥 틈새에 숨어있던 벌레들에게 사정없이 물어 뜯겨서 체중이 확 줄 정도였어요. 하하하.”
그들은 별이 눈부신  하늘을 우러러보며 함께 찬양을 했다. 이 전도여행에 주님이 함께 하셔서 더 많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 싶다는 소망이 넘쳐났다.
두 사람은 원주, 대구, 부산, 의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전도여행을 계속했다.
그 결과 1889년에는 27명의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29명을 준 교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펜젤러는 여행을 통해 조선에 미신의 뿌리가 대단히 깊다는 것을 알았다. 몹시 안타까운 일이었다. 몹쓸 병이 걸리거나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으레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조선 사람의 생활 속엔 미신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뿌리째 뽑아낼 수 있을까’
아펜젤러는 귀신과 도깨비를 조선 땅에서 모조리 쫓아내고 싶었다. 섣달그믐이면 국왕이 외국인들에게 보내는 첫 통지문 중의 하나가 악한 귀신들을 쫓기 위해 화약을 터뜨리니 그 소리에 놀라지 말라는 것이었다. 국왕도 백성들도 악한 귀신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배재학당 근처에 지석이 하나 서 있었다. 이 지석은 죽은 사람들의 인적사항과 무덤의 위치 등을 적어 둔 것이었다.
지석이 서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조선 사람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허어, 돌덩어리를 보고 무서워하다니.”
아펜젤러는 학당에 오는 학생들이나 손님들의 공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안 되겠군, 내가 저것을 치워야겠어.’
아펜젤러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석을 치워버리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교장선생님, 대체 어쩌려고 그러세요?”
“하하하, 돌은 그저 돌일 뿐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문제지요 ”
사람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아펜젤러를 쳐다보았다.
“미신을 버리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들의 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귀신도 넉넉히 쫓아낼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교장선생님이 오늘 밤 무사하실지 모르겠어요.”
“글쎄요. 귀신 돌을 치우셨으니 걱정이 됩니다.”
 사람들은 오늘 밤 귀신들이 교장선생님을 잡아갈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했다.
아펜젤러는 사람들을 사로잡은 미신이 물러가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교육뿐 아니라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감리교신문인 《죠션크리스도인 회보》와 감리교잡지까지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배재학당에 입학한 조선의 젊은이들은 처음엔 신학문인 영어를 배워 출세하고자 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신앙 훈련을 통해 그들은 점점 변화돼 갔다. 학교의 분위기는 기독교 정신으로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기독교 정신이 담긴 대학교를 꿈꾸었다. 언젠가는 기독교 대학을 세워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고 싶었다. 아펜젤러에겐 선교 다음으로 교육이 가장 귀한 과제였던 것이다. 그는 ‘배재학당’ 선생님들에게 말했다.
“나는 우리 ‘배재학당’의 모든 학생이 장차 조선을 이끌어나갈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을 바라오.”
“교장선생님, 학생들이 기도회를 열고 성경공부반도 만들었답니다.”
“오, 그래요?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아펜젤러는 대단히 기뻐하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펜젤러의 교육 이념과 신앙 훈련에 큰 영향을 받아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학생들의 삶이 변화되었으며 그 변화는 누룩처럼 조선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던 중 ‘독립협회’ 가 조직되었다. ‘독립협회’는 ‘정동구락부’란 단체가 발전하여 만들어졌다. ‘정동구락부’는  처음엔 뜻이 통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친목을 도모하고, 세상물정도 서로 이야기하고, 불쌍한 사람도 돕는 단체였다. 그러다가 점점 사회개혁 운동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독립협회’란 단체로 태어난  것이다. ‘독립협회’의 중심인물은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같은 사람들이었다.
‘독립협회’의 설립 취지는 『우리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우리 국민이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굳세어진다』는 것이었다. ‘독립협회’의 정신은 기독교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1896년 4월 7일. 마침내 국내 최초의 한글판 ‘독립신문 창간호’가 세상에 태어났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가 창간한 국내 최초의 신문이며, 무엇보다도 한글로 씌어졌다는 게 특기할만했다. 그 당시 한문문자 투성이던 세상에 문자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독립협회’는  첫 해의 중요한 사업으로 ‘독립문’을 세우기로 했다. 우리나라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독립문을 세울 장소였다. 서재필은 독립협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회의를 소집했다.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게 좋겠습니다.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환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 아닙니까? 이는 국가의 치욕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회의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청나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이날, 독립문 정초식에는 국내외 귀빈들이 500여 명이나 모였다.
아펜젤러는 이 자리에서 간절하게 조선을 위해 기도하였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하나님께서 지켜주고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배재학당 학생들은 애국가를 소리 높여 합창했다. 아름답고 맑은 목소리로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부르는 애국가는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독립협회’가 외세의 개입을 반대하고  개혁을 요구하자 개혁을 반대하고 저지하려는 정부와 자주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 정부는 마침내 ‘독립협회’의 중요 인물들을 잡아 가두고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사실 아펜젤러는 ‘독립협회’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특히 ‘독립협회’의 자매단체인 ‘협성회’와 ‘배재학당’과는 관계가 깊었다. 아펜젤러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복음을 전했으며 남겨진 그들의 가족을 돌보았다. 이때 이승만, 이상재 등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주관했던  민중의 집회였다. 여기 ‘배재학당’ 학생들 상당수가 참여한 것을 안 학부대신이 아펜젤러를 찾아와 말했다.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학생들을 해산시켜 주십시오.”
“오, 그런 일이 있습니까? 전혀 모르는 사실입니다.”
이번엔 미국공사 알렌이 학생들을 해산시켜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아펜젤러는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황제도 대궐 문 앞에 있는 군중을 해산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국법은 순종해야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에 벗어나는 일이면 따르지 말라’는 것이 아펜젤러의 신념이었다. ‘만민공동회’는 선량한 민중들의 정당한 집회였다. 이 집회를 방해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이처럼 그는 당시 부당한 정부의 시책에 맞섰던 용기와 신념으로 뭉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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