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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호

‘착한’에 대한 유감
  글·최원현 (수필가.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청운교회 )
차를 타고 가는데 ‘착한 낙지’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보니 낙지요리 전문점 같다. 그런데 착한 낙지? 어떻게 낙지가 착할 수 있을까. 하기야 ‘착한 살인자들’이란 영화 제목도 보았다. 어떤 경우에도 살인자가 착할 순 없는 건데 참으로 혼란스럽다.

언어는 시대 따라 변하는 것이긴 하지만 근래 들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언어 행위들을 보면서 영 마음이 개운치 못하다. 특히 ‘착한’이란 말이 요즘 마구 쓰이고 있는데 ‘착한’이란 말을 이렇게 아무데나 붙여도 되는 것인가. 한 TV 방송사는 ‘먹거리 X파일’이란 프로를 진행하고 있는데 ‘착한 식당’찾기란다.

착한 식당, 식당이 어떻기에 착한 식당일까. ‘착한’이란 ‘사람이나 그 마음이 곱고 어질다’,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고 상냥하다’라는 뜻의 형용사다. 결국 사람과 관련해서만 쓰일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낙지가 착할 수 있고 식당이 착할 수 있는 것인가. 식당에도 마음이란 게 있을 수 있는가. 궁금해서 그간에 착한 식당으로 선정되었다는 곳들을 알아보았다.

방송사에서는 좋은 식재료만을 써서 양심적으로 음식을 만들어 판매하는 식당, 그날그날 신선한 재료를 써서 정직하게 영업을 한다는 식당을 찾아내서 검증단의 검증을 거쳐 착한 식당으로 선정 했다는데 맛도 있다지만 주인이 양심적으로 운영하는 식당들이었다.

유기농 재료만을 쓴다는 떡볶이 집, 신선한 선지와 야채로 매일 직접 만든다는 순대, 국산 재료만을 쓰는 김치찌개, 대나무를 재사용 하지 않는 대나무 통 밥집, 천연재료로만 손수 빚는 떡집, 친환경 유기농 김밥 집, 금방 지은 밥만 고집하는 백반 집, 그날그날 새 기름만 쓴다는 튀김집, 통밀을 천연발효 시켜 만드는 빵,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는 짬뽕 집 등이 착한 식당으로 선정된 곳이었다.

하기야 요즘처럼 먹을 것으로까지 장난을 치는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적은 이익에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양심적으로만 장사를 하는 집들이니 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런 착한 주인이 있다고 식당이 착한 걸까, 한데 더 문제는 우리가 이런 말의 사용에도 벌써 익숙해 져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전혀 거부감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근래 ‘착한’이란 말이 붙어 쓰이는 것들을 보니 착한 고기, 착한 운전마일리지, 착한 연애, 착한 전복, 착한 햄버거, 착한 여행, 착한 가게, 착한 기변, 착한 점심, 착한 가격, 착한 분양가 등 정말 다양하게도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착한’이 아니면 뭐가 되는가. ‘착한’이 안 붙은 것은 모두 악하다는 말인가. 착하다는 말은 정말 좋기만 한 말일까. 그런데 내 기억 속의 ‘착한’은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딸아이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는데 결혼 전에 참으로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니, 그보다 더 착할 수는 없다느니, 요즘 세상에 어찌 그렇게 착할 수 있느냐느니 하며 ‘착한’이 늘 따라다녔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내 마음은 불편했다. 착하다는 그 말이 반의적으로 받아들여져서 말은 그렇게 해도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무언가 현실에 맞지 않는 사람이란 말로 일종의 비아냥거림처럼 들리고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아이는 남에게는 한없이 좋을 수 있지만 부모인 내가 볼 때에는 속이 터져버릴 만큼 답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돈도 벌고 자기 소망도 키워 가는데 결혼 할 나이가 넘어가는데도 십 수 년째 무료로 자폐아들을 위해 일을 했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그건 결코 착한 것이 아니라 바보스러운 것이라고 아이를 윽박질렀다. 그런 내게 아이는 ‘나까지 그 일을 안 하면 저 아이들은 어떡하느냐’고 했고, 나는 ‘그 일을 왜 너만 도맡아 해야 하느냐’고 몰아붙였다. 사람들이 아이를 착하다고 하는 것이 ‘저 바보!’하는 것으로 들렸다. 늘 손해 보고, 좋은 것은 다 빼앗기고 마는 그러면서 남이 안 하려는 것이나 나타나지 않는 일만을 해내는 아이에게 붙던 착하다는 말은 내겐 결코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나도 어렸을 때 착하다는 말을 꽤 들었다. 그러나 내가 들었던 착하다는 말도 유쾌한 게 아니었다. 말썽 안 부리고 싸움 않고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 붙여진 거였다. 하지만 사실은 그 착함의 뒤엔 내 자존심도 내던지는 것, 내 분을 내뿜지도 못하는 억울함이 있었다. 할머니는 어떤 경우에도 싸움은 안 된다고 하셨다. 내가 잘못한 게 전혀 없고 너무 분하여 덤벼들었는데도 그 날 나는 종아리에 피가 맺히도록 매를 맞아 다음 날 걸음을 걸을 수 없을 정도까지 되었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나보다 어린 아이들까지 나에게 함부로 덤벼들며 내가 대응이라도 하려하면 할머니께 이르겠다고 하며 나를 겁주곤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그들을 피해 빨리 집으로 돌아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 속에 늘 나는 없어서 착한 아이가 되어 있었지만 난 그게 너무나도 싫었다.

요즘은 광고에도 ‘착한’이 붙지 않으면 광고가 되질 않는지 심지어 착한 가슴, 착한 허벅지까지 등장했다. 얼마 전엔 대통령까지 한 지방의료원의 적자에 대해 ‘착한 적자’라 하여 나쁘지 않은 적자, 오히려 장려해야 할 적자라는 이상한 논리의 말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착한’은 선악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하에서 어떤 상황에서건 적자는 좋지 않은 걸로 배워 왔다. 그런데 ‘착한 적자’가 되어버린 순간 적자를 안 내고 잘 해 온 곳들이 나쁜, 잘못한 것이 되어버렸다. 아니해도 이분법이 주도하는 나라인데 ‘착한’이 사람 아닌 것에까지 들어가다 보니 착한이 붙지 못한 것들은 꼼짝 없이 나쁜 것 또는 잘못된 쪽으로 밀려버렸다.

난 한 신문만 십수 년 간 계속 보아왔고 휴대전화기도 3년이 넘게 쓰고 있었다. 고맙고 착한 독자요 사용자라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인이 나에게 왜 그렇게 바보짓을 하느냐고 했다. 타 신문으로 바꾸면 6개월은 공짜로 넣어주고 다른 혜택도 많다 했다. 1년 후 다시 돌아오면 또 그만큼의 혜택이 온다고 했다. 휴대전화도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좋은 것이 나오는데 3년씩이나 쓰고 있느냐며 그 정도면 공짜로 제일 좋은 신형 전화기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억울한 것 같기도 했지만 그보다 내가 진짜 바보인 것 같아 속이 상하고 부끄러워졌다. 하기야 강남에서 30년 가까이 한 아파트에서 산 나에게 바보란 말을 하던 친구도 지인도 여럿 있었다.
착한이 붙어 다니던 딸아이가 결혼하여 셋째를 갖자 어떻게 키우려고 그러느냐고 가장 가까운 이들이 우려를 표했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몇 억이 들어가는데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당사자는 아니다.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태어나는 순간 알겠다고 성별도 의사에게 못 알려 주도록 한 아이다. 나도 그 걱정은 안 한다. 남들처럼 키워야만 하는 건 아니잖는가. 요즘 들어 생각하면 난 아이보다 나이를 곱절이나 먹었지만 아이의 생각에 못 미쳤던 경우들이 많았음을 깨닫는다. 시집도 안 가고 봉사만 하던 아이, 그래서 한심할 만큼 바보스러워 보이기만 하던 아이, 그 아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하면 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는데 그때 그 아이가 옳았다는 생각, 아이가 잘 했었다는 생각을 지금 와서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내게 붙여지던 억울한 착함이나 늦게라도 그런 아이를 인정하는 것도 시대와는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아이나 나의 바보 딱지는 떼어버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요즘 쓰이는 ‘착한’은 그때의 그런 것과도 다르다. 그래서 더 많이 아쉽다. ‘착한’이란 말이 아무데서나 아무렇게 너무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이다.

내게 ‘착한’은 그냥 ‘착한’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진리 같은 거다. 당장은 아녀도 시간이 가면 좋은 일로 밝혀지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착한’은 억지로 좋게 보이려 하는 것만 같아 그냥 가슴이 아프다. ‘착한’만 갖다 붙이면 다 좋게 보아주고 믿어주고 생각해 줄줄 아나보다. 착한 일, 착한 사람이 많아져야 세상이 좋아진다. 그런데 왠지 요즘 유행하는 ‘착한’은 착해 보이지가 않는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착한 낙지’에는 한 번 가보고 싶다. 어떻게 어째서 착한 낙지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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