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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호

좋은 아버지
  글·유한익 (서울우리아이마음클리닉 원장. 본지 편집위원. 남포교회)
요즘은 부쩍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한 해가 다르게 점점 약해지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옆에서 보기 때문일까? 아님 아버지로서 나의 부족함을 자주 느끼기 때문일까? 오해가 없길 바란다. 실은 나에게는 아버지가 한 명이 아니다. 하늘 아버지, 늙으신 혈육 아버지, 아버지인 나, 아이들 문제나 본인의 문제로 진료실에 찾아와 자신의 삶과 마음을 열어 주신 아버지들, 살면서 알게 된 여러 세상의 아버지들. 그리고 직업상의 목적으로 공부한 ‘아버지임(paternity)’이 투영된 실체가 아닌 만들어진 아버지도 있다.

어찌 살다 보니 아버지가 된 사람도 있고, 아브라함처럼 간절하게 아버지가 되길 원했던 사람도 있다. 혹은 아버지가 되기를 원치 않았지만 본의 아니게 억지(?)로 아버지가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정과 정도는 다 다르겠으나, 일단 아버지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떤 강한 무게감이 생긴다. 레지던트 시절, 분석심리학의 대가이신 은사님은 사례 토론 시간에 “아버지 됨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셨다. 여러 주장과 토론이 있었지만, 마무리는 한가지로 모아졌다. 다름 아닌 바로 ‘책임(responsibility)!’ 아버지가 아니었던 그 당시에는 단지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던 그 단어는 아버지가 되던 그 순간부터 묵직한 실체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라는 인격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일종의 체험 같은 것인데, 아마 독자들도 공감하리라 믿는다.
 
아버지 ‘父’는 돌도끼를 들고 일하고 싸우는 손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어원인 ‘pa’는 음식을 의미하는 말로서, 아버지란 돌도끼를 들고 일하고 싸워서 집에 음식을 가져오는 존재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아버지의 심리사회적 이미지가 담겨 있다. 첫째는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경제적 활동 즉 부양 의무를 말한다. 둘째는 가족구성원으로서 가정 외의 다른 삶, 밖에서 일하는 삶이 있음을 의미한다. 즉 사회적 활동을 말하는 것인데, 모름지기 좋은 아버지란 사회적 성공이나 인정, 출세와 같은 과제도 부여 받는다. 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바깥세상은 그야말로 양육강식의 원칙이 지배하는 곳이다. 아버지는 이런 야생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셋째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때로는 누군가와 싸워 이겨야 한다는 다소 전투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아버지는 신체적으로 강해야 하고 그래서 가족을 지켜내야 한다. 물론 이런 전통적인 아버지 이미지는 현대에 들어와서 적잖이 변화되었다. 하지만 그 심상은 우리 삶 속에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좀 전에 말한 어떤 ‘무게감’으로 말이다.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모름지기 좋은 아버지란 이 모든 것을 다 감당해 내야 한다는 어떤 ‘당위(should)’가 사람들의 생각 속에 녹아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부장적인 가족문화가 점점 사라진 요즘은 아버지들이 더 바빠졌다. 양육에 대해 아버지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사뭇 달라졌다.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아버지가 자녀와 더 많이 놀아주기를 권장한다. 책 읽기와 같은 직접적인 교육도 아버지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어머니가 전담했던 다양한 양육 관련 결정에 직접 참여하라고 한다. 아이의 기저귀도 갈아주고 잠도 재우고 병원과 학교도 방문하라고 요구한다. 이처럼 고전적인 아버지 역할을 넘어선 보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아버지의 양육 활동이 자녀의 행동문제의 감소, 사회/관계 기능 및 교육성과의 우월함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가히 설상가상이다. 이 모든 것을 다 만족시키려면, 이제 아버지는 슈퍼맨 정도가 아니라 어벤저스 수준의 놀라운 수행능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어떤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일까? 모든 당위와 기대를 다 충족시켜주는 그런 완벽한 아버지일까? 그렇다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머리 둘 곳이 없다. 이미 아시겠지만 현대 아버지들의 몸과 마음은 이미 망가질 만큼 망가졌다. 온갖 성인병과 스트레스로 만신창이 신세다. 중년 남성 우울증은 날로 증가하고 자살률도 꽤 높다. 잊을 만하면 사업이나 관계에서 실패한 나머지 한강에 투신하는 아버지들의 소식이 들려온다. 이런 현상들은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아버지의 심상에 커다란 한계가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성공하고 이겨내고 결국 잘해내야만 제대로 아버지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 세상은 아버지에게 바로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믿음. 하지만 그것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오히려 이런 생각은 우리 아버지들을 아프게 하고 결국은 세상까지도 병들게 만드는 잘못되었고 나쁘고 실현 불가능한 가치관이며, 무엇보다도 진실이 아닌 거짓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좋은 아버지는 첫째, 솔직한 아버지다. 진솔한 것만큼 강한 것은 없다. 거짓과 포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하고 약해지지만, 솔직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이 상황이 어려워지고 복잡해질수록 점점 힘을 얻고 빛을 발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삶은 위장이 없기에 쓸모없는 노력이 들지 않는다. 무슨 자격조건이나 사전준비가 필요 없다. 그러니 지극히 단순하고 그래서 가장 파워풀하다. 진실만큼 설득력 있는 것은 없다. 미사여구는 없는 것을 있게 보이거나 있는 것을 감추려고 할 때 필요한 장치에 불과하다. 1990년에 제작된 프랑스 영화 “마르셀의 여름(My Father’s Glory)’에는 전능한 신처럼 생각했던 아버지에게서 연약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6세 소년의 마음이 잔잔히 그려지고 있다. 소년은 가족 친지들과의 휴가 기간을 통해, 훌륭하고 이상적인 마음 속 아버지의 모습 대신 인간적인 아버지의 실제 참 모습을 목격하며 진정한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결국 소년은 제대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 영화 제목에서 암시하듯 아버지의 평범하고 연약한 실제 모습 속에 진정한 영광스러움이 숨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좋은 아버지는 자신이 먼저 앞장서야 한다. 가족의 모든 일과 문제에 뒷짐을 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진료실에서 자녀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아버지들을 많이 본다. 어머니는 자녀의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방문해 함께 울고 웃으며 고민을 나누지만, 어떤 아버지는 얼굴 한 번 보기 어렵다. 바쁘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세상에 자녀 문제보다 더 시급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자녀가 바로 서지 않으면 죽을 때도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는 법이다. 반면 오랜 시간 쉽지 않았던 자녀의 문제가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해결되는 경우를 적지 않게 경험했다. 특히 우리나라 아버지들은 체면을 중시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낯설고 창피하고 껄끄러운 일에는 본인이 나서지 않고 아내를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솔직히 비겁한 행동이다. 심리학적으로도 자녀의 문제, 특히 아들의 문제를 아버지는 어머니에 비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마치 자신의 실패요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시기 바란다. 어색하고 지저분하고 귀찮고 하찮아 보이는 일일수록 앞장서시길 부탁드린다. 멤버들은 솔선수범하는 리더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존경하고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좋은 아버지는 자신을 보살필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 건강을 잘 관리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가족 내에서 아버지가 가장 먼저 쓰러지기 쉽다. 나이도 많은데다가 늘 두 어깨에 온갖 짐을 잔뜩 지고 있으니 지치기도 가장 쉽다. 자녀들은 매일같이 성장해서 맞먹으려고 하고 젊은이들은 뒤를 바짝 쫓아온다. 지쳐 쓰러져 버린다면, 좋은 아버지는커녕 오히려 가족에게 부담이 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시라. 큰 욕심도 부리지 말자. 앞만 보고 무조건 달리지만 말고, 종종 뒤도 돌아보고 잠시 쉬었다 가기를 바란다. 오랫동안 힘을 잃지 않도록 긴 안목을 갖고 있는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다.
 
누군가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축복이며 행운이다.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를 기뻐하셨다(습3:17). 우리도 그런 아버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실력은 좀 부족하더라도 솔직한 아버지, 말보다는 삶으로 솔선수범하는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삶을 아끼고 유지시킬 줄 아는 아버지. 세상의 자녀들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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