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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호

한계와 희망-임계점
  글·최원현 (수필가. 문학평론가.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청운교회 )

공자는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 하여 나이 서른이 되면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도록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 마흔이 되면 불혹(不惑)이라 하여 미혹됨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 삼십 세는 부모의 도움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학업조차 다 마치지 못한 경우도 있다. 20대에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야 50대에 자녀 결혼도 생각할 텐데 40이 다 되어 결혼을 하면 60이 넘어도 자녀가 학생일 수밖에 없다. 물론 생존연령이 길어졌으니 그 또한 자연현상이라 할지 모르나 시대는 50세만 넘겨도 일자리를 내주고 떠나라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급해지는 것은 비단 나이 든 부모만은 아닐 것 같다.

95세 노인의 글이 한 때 사이버공간을 회자 했었다. 65세면 아무것도 시작할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95세에 이르고 보니 그 때 무엇이건 시작 했더라면 상당히 이룰 수 있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L 화랑에서 명인전이 열렸다. 명인이란 어떤 분야에서 기술과 재주가 뛰어나 이름이 난 사람을 일컫는 말로 자신의 분야에서 20년 이상의 경력을 갖고 현재도 그 분야에서 활동을 하는 명실공히 그 분야 최고의 지도자 내지 대표자이다. 명인전은 그런 분들의 작품을 일반에게 보여주는 전시회였다.
참으로 놀라웠다. 사람의 재주가 어디까지일까 의아심이 일만큼 신기에 가까운 재주들이었다. 연세가 많으신 분도 있었지만 내 나이보다 적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저들은 나보다 몇 배나 더 치열한 삶을 살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코 보통 사람의 삶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경지다. 특히 여러 작품 중에서도 동물 조소의 작품이 내 눈을 끌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 같았다. 내 나이 또래의 명인 작품이었다. 어떻게 만든 것이냐고 했더니 흙에 먼저 형상을 조각하고 그 조각된 형상으로 본을 뜬다고 했다. 거기에 우리 질감을 느끼게 하는 한지를 바른단다. 생각보다 견고했다. 그러나 가볍기 그지없는데다 입체감은 말할 것도 없고 안에 불을 밝힐 수도 있어서 아름다운 조명기구가 되었다. 실제 조명을 밝힌 것을 보니 참으로 아름다웠고 한지의 고상함이 오히려 친근함이 느껴져 더욱 좋았다.
그들에겐 한 가지 이룬다는 것이 어쩌면 새로운 것에의 시작이 될 것 같았다. 몇몇 작품을 둘러보면서 나와는 다른 유형의 사람 같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처럼 끈기도 참을성도 인내심도 없는 사람은 결코 넘볼 수 없는 지경 같았다.

임계점이란 게 있다. 저온 상에서 고온 상으로 상변화를 할 때 저온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한계 온도와 압력이다. 물이 100도가 되어야만 끓고 꽃이 일정온도가 되어야만 피듯이 모든 게 이 임계점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완성이 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완성을 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단다. 대부분이 바로 못미처에서 포기하거나 중단하기 때문이란다.

사람의 평균 생존연령이 90세를 바라보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생명의 동작을 쉬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라기를 멈춘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95세 노인의 말처럼 65세면 살만큼 살았고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그 생각이후에도 무려 30년을 더 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있으니 또 얼마를 더 살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 수명에 임계점은 적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신이 내게 허락한 시간들을 보다 경건히 맞는 마음이요 신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과 감사다.

산딸기가 먹고 싶다는 아픈 엄마를 위해 겨울 산을 누비던 소녀가 산딸기를 얻은 건 기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기적이 되지 않는다. 계절에 관계없이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을 수 있다. 그러다보니 기다린다는 것도 참는다는 것도 잘못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임계점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진 않는다. 기다리고 참음의 결과다. 씨를 뿌리고 기다려야 싹이 트고 자라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는다. 어느 과정 하나도 허투루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정해진 질서를 따라 임계점을 지키며 과정 하나하나를 이루어간다. 그게 자연 질서요, 삶의 순리다.

큰 손녀는 아주 말을 잘 한다. 세 살짜리는 몇 마디 밖에 못한다. 알아듣기는 다 하지만 말로 표현은 다 못한다. 그러니 그 답답함이 오죽 하랴. 보고 있는 내가 답답한 것 몇 배로 그는 더 답답하리라. 그런데 작은아이는 빨리 걸었는데 큰 아이는 걷는 게 늦었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제 스스로 걸을만하다 여겨졌을 때 걷는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보행기를 써서 훈련을 하면 더 빨리 걸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자칫 아이에게 나쁠 수도 있다는 말이 이해되었다. 아이는 못 걷는 것이 아니라 걸을 때가 되지 않아서였다. 저도 빨리 걷고 싶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이 조급해 진다.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다고 느껴져서이다. 하지만 그 또한 욕심인 것을 안다. 내가 못하게 되는 것은 내 일이 아닐 것이다. 내가 못 한다고 되어야 할 일이 아니 되지는 않는다. 내가 없어져도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갈 것이다. 그런 만큼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 내 자리에서 내 몫을 하면 된다.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게 존재한다.

몇 년째 꽃을 피우지 못하는 난분이 있다. 그러나 그도 언젠가는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내가 그를 위해 해 준 것이 그가 꽃을 피울 수 없는 조건을 만들었음일 것이다. 올 겨울엔 좀 더 추운 곳에 있게 해 줄 생각이다. 잎만 무성한 건 그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잖는가. 그러니 나를 생각하면 부끄러워진다. 삼십이립(三十而立)도 사십불혹(四十不惑)도 지난 지가 언젠데 해놓은 것도 없고 확실히 서있지도 못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벼도 여물면 고개를 숙여 수확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는데 나는 임계점 바로 앞에서 멈추거나 포기하고 마는 신의 불량품인 것 같으니 이를 어쩌랴. 그게 내 한계인가. 조금만 더 할 순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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