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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호

내 속의 이중성
  글·김 윤 (조원병원 병원장. 본지 편집자문위원. 영락교회 )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은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5~24)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서 항상 갈등을 일으키는 모순된 인간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가장 잘 표출시킨 작품 중 하나인 괴테의 파우스트를 생각해본다. 지극히 성실하고 학문적이고 이성적인 파우스트는 자신의 노력으로 최고의 학문의 경지에 도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고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데 필자는 메피스토펠레스가 다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속에 내재하는 또 하나의 존재가 잠재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또 헤르만 헷세의 작품인 나르찌스와 골드문트 역시 나르찌스와 골드문트라는 두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라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바탕에 있는 이성과 감성의 대비 속에서 빚어지는 삶과 죽음의 모습을 통해 이 역시 궁극적으로는 한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된 인간의 속성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고 싶다. 또 하나의 작품으로는 표현방식은 다르지만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과 하이드는 이러한 필자의 생각을 좀 더 확신 시켜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문학작품 속에서 뿐 아니라 실제 우리 주변의 모습을 보더라도 상상하기 힘든 언어와 행동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예는 너무 많다. 평범한 범부들의 모순된 말이나 행동보다는 이해하기 쉬운 대상을 찾아보자. 독재자 스탈린이 얼마나 자기 딸을 사랑하고 자상했는지, 나치 독일의 히믈러가 자신의 딸에게는 얼마나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이었는지, 좀 더 가까이는 북한의 김정일이 자신의 딸에게는 얼마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버지인지, 등등. 우리는 역사 속에서 문학 작품 속에서 또 현실에서 인간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이고 모순된 행동을 당연한 듯이 하면서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는지 보고 있다.

그보다 좀 더 가까이는 오늘 우리 주위의 모습들을 보자. 수년 전 어느 목사님이 권총강도 행각을 하다 체포 되었던 기사가 신문의 사회면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그 목사님은 강도행각의 명분을 교회건축을 위해서였다고 했다. 오늘 아침 신문에는 어느 취객의 소지품과 지갑을 털다 체포된 목사님의 기사가 실렸다. 또 동물 애호가라는 어느 여배우는 동물 보호를 위해 천문학적 기금을 기부하면서도 아프리카나 동남아등지에서 한 끼의 식사가 없어서 굶어죽는 같은 동족인 이웃을 위해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주변을 보자, 식은 죽 먹듯 거짓말을 태연히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내뱉는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구호는 제쳐 놓더라도 구체적 증거와 법적으로 부정할 수 없게 될 때까지는 자신의 모든 혐의와 잘못을 모든 미사여구와 절대적 언어를 구사하며 부정하는 소위 지식인들, 이들 중 특히 정치인, 법조인, 종교인, 교육자, 교수 등 사회적 지도층들이라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기보다는 그저 다 그런 것 아니냐고 당연시하는 사회의 변화가 더 무서운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네 정치인들은 자신의 의견이나 판단이나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일정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이 비록 누가 보든지 아니면 심지어 자신이 볼 때 한없이 모순된 행동이라 해도 관계가 없다. 백보 양보해서 정치인들의 행동은 그가 속한 정당의 결정이나 방향 때문이라고 하자, 특히 사상적 편견을 가진 정치인이나 그들을 신봉하는 자들의 행태를 보면 정상적인 사고나 양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언어나 모순된 행동들을 태연히 보여준다. 또 어느 목사님의 사모가 교인들에게 “우리 목사님은 주일날 강대상 위에 있을 때는 천사지만 강대상에서 내려와 집에만 오면 마귀예요” 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중세 암흑기 천주교의 부패현상을 보고 마틴 루터가 위텐베르그 성문에 공개한 95개조 질문은 단지 교리적 해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식적으로나 양심상 도저히 받아 드릴 수 없는 이해가 안되는 모순된 부분에 대한 질의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게 되고 삶을 영위하는 동안 정상적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
 자신이 성화되는 과정을 밟아가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이 걸어가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또 그것이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일생동안 노력해야 할 길일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의 한 사람인 바울은 자신의 속에 존재하는 모순된 두 존재로 인한 괴로움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사도 바울이 무엇을 가지고 이렇게 괴로워하고 힘들어 했고 이러한 고백을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자신 속에 모순된 원하지 않는 존재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악” 이라고 했다.

그러기에 문학작품 속에서 표현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다른 두 존재가 아니라 괴테 속에 존재하는 두 개의 모순된 존재의 깨달음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르찌스와 골드문트 역시 이성과 감성을 가지고 방황하는 두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헤르만 헷세 속에 존재하는 두 모순된 존재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표현의 방법은 다르지만 스티븐슨의 지킬과 하이드 역시 한 인간 내에 존재하는 모순된 두 존재를 설정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원하지 않는 존재의 인식과 표출은 역사 속에서 회자되는 인물들의 모순된 사생활과 언행을 통해 알 수 있고 그보다도 우리 주변의 이웃 같은 친밀한(?) 인물들의 모순되고 이중적인 언행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내 자신 안에 존재하는 모순된 또 하나의 나라는 존재를 인식함으로 사도 바울의 고백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면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와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인가? 크든 작든 우리는 우리 속에 존재하는, 아니 나 자신 속에 존재하는 모순된 또 하나의 원하지 않는 존재가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그의 신앙여정의 삶을 마무리하며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 맡기는 고백을 할 수 있었는데, 너무 보잘 것 없고 모순되고 초라한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는지? 오직 주님의 긍휼을 구할 뿐이다.(시 33:22;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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