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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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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최원현 (수필가. 문학평론가.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청운교회 )

핫팬츠를 입은 젊은 여성이 왼손에 핸드백과 쇼핑백을 함께 들고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젊은 여자 앞에서는 무늬 있는 한복을 입은 두 중년 여인이 걸어가고 있다. 1970년대 변화하는 명동의 모습을 보여주는 핫팬츠와 한복의 대조는 과거와 현재, 옛것과 새것이 교차하는 길목을 보여준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숙인 채 ‘求職’이라 쓴 종이를 고무줄로 가슴에 묶은 젊은 남자가 힘겨운 듯 벽에 기대어 서있다. 젊은 남자의 뒤에선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 둘이서 가던 길을 멈추고 반갑게 악수를 하고 있다. 활기찬 삶의 길에서 우연히 만난 반가운 해후와 누군가가 써주길 바라며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에서 그 시대의 아픔을 본다.
석조건물의 왼편과 오른편에 커다랗게 걸려있는 두 사진의 분위기는 전혀 다른 상황을 한 사진에서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기록의 예술, 예술의 기록’이라는 주제의 임응식 사진전을 보았다. 금방 출사를 마치고 돌아온 듯 사진장비를 맨 십여 명의 남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는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전시물을 보고 있다.
임응식 사진전, 그의 사진을 만난 건 내겐 큰 기쁨이었다.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그의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각각의 사진이 그 시대의 두꺼운 이야기책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그는 어떻게 사진을 가까이 하게 되었으며 그는 사진을 통해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저 풀죽은 젊은이와 젊은 여성 사이 세월 간격 속에서 임응식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가.
임응식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11월 11일 부산에서 태어나 2001년 5월 18일 서울 성모병원에서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교육자요, 평론가요, 사진작가라고 한다.
이번 전시회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된 대규모 회고전으로 미술관 소장품 160점에 유족이 소장하고 있던 필름을 인화한 미공개 사진작품 40점까지 200여점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현실에 대한 진실한 기록이라 말했다는데 자신의 작품을 통해 한국의 시대상과 리얼리즘 사진의 정수를 보게 하려 함이었을까.
임응식과 국립현대미술관은 인연이 깊다고 한다. 1957년 뉴욕 근대미술관(MOMA)의 <인간 가족전>을 국내에 유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게 하여 큰 호응으로 사진계의 판도를 바꾸어놓았단다. 198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사진전시회가 임응식 초대전으로 열렸고 그것을 계기로 그는 작품 420여점을 미술관에 기증하게 되었단다. 이번 전시회의 미술관 소장품 160점에도 그의 기증작이 많을 것 같다.
사진을 통한 그의 삶, 사진을 위한 그의 삶과 그의 삶속에서의 사진은 그의 개인작품을 넘어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었고 슬픔과 아픔과 고통에서 환호와 감격까지의 과거를 현재에 보여주게 되었다.
그의 사진 1950년작 <피난 어린이들>은 가마니로 싸고 새끼로 묶은 피난 짐 더미 속에 앉아있는 다섯 아이들의 천진한 눈매를 통해 이들에게 전쟁이란 무엇일까 묻고 있었다. 또한 1955년작 <안익태 초상>처럼 그가 추구한 1930년에서 1960년대의 예술사진에서 사진예술로, 1960년에서 1980년대 초까지의 문화재와 예술가의 기록을 통해서는 역사 속 어제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1953년 작으로 그의 대표작인 <구직> 앞에 서면 임응식이 보았던 그때 전쟁의 상처와 견딜 수 없던 삶의 역경을 현실에 대한 진실한 기록으로 만나게 된다. 한 장의 사진으로가 아니라 그가 보여주려 했던 그 시대의 모든 것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사실과 그 사실 속에서 보여지는 메시지는 그가 한결같이 주장하고 추구하던 사진의 본질이 기록성과 사실성에 있음을 재확인 시킨다.
임응식은 특히 그 시대 사람들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관심은 지극한 사랑이다. 그의 그런 관심과 사랑은 언제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임응식은 14세 때 맏형으로부터 박스카메라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1926년 일제강점기에 카메라를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웬만해선 꿈도 꿀 수 없는 파격이다. 그는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 시대의 소년시절을 그림과 하모니카. 바이올린 등 예능분야에 손대지 않을 것이 없었다면 예술에 타고난 안목과 소질이 풍부해서이기도 했겠지만 그만큼 여유롭고 풍족한 가정에서 생활을 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그였기에 열네 살짜리가 카메라를 선물 받을 수 있었고 그 카메라로 찍은 <정물>이 1934년 풍도체신학교를 졸업하던 해 일본「사진살롱」지에서 입선을 하고, 다음 해인 1935년엔 강릉사우회를 창립하여 회장이 되면서 전조선사진 살롱에 <뚝을 가다>와 <母子>를 출품하여 입선을 한다. 그렇게 그의 사진 인생은 순조롭게 펼쳐져 해방이 되자 1947년에는 부산에서 부산사진연구회도 창립한다.
그런데 1950년 6.25가 발발했다. 그는 1950년 인천상륙작전의 보도반으로 종군하면서 전쟁의 안과 겉을 다 체험한다.
“폭격으로 부서진 서울은 그야말로 유령의 도시였다. 그 속에서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너무 끔찍하고 소름이 끼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고사하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서울에 입성한 후 사흘간은 사진을 한 장도 찍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대상만을 아름답게 찍어대던 나의 카메라 버릇을 사흘 동안 극복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점점 예술사진가에서 기록사진가로 변해갔다. 역사의 현장을 기록해서 남기는 중차대한 임무가 주어졌다는 지각을 비로소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전쟁 중에 ‘경인전선보도사진전’을 열었다. 6·25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참전하며 그가 본 전쟁의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후 현실주의 사진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작품에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시대를 증언하는 사진들’이란 대명사로 임응식을 떠올리게 하는 탄생 100주년 기념 회고전은 그래서 더 큰 의미 있는 사진전이었다.
무엇을 얼마큼 어떻게 남기고 갈 것인가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숙제이리라. 그런데 임응식은 사진을 통해 수많은 말을 대신했다. 하고 싶은 말도, 보여주고 싶은 것들도, 없었으면 하는 것도, 아름다운 것 남기고 싶은 것까지도 그는 사진으로 말하고 사진으로 남겼다. 그가 간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그는 사진속에서 그의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사진 한 장이 보여주는 힘과 느끼는 순간이었다. 나는 무엇으로 내가 살았던 날들을 남겨 내 후의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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