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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호

십자가와 두 가지 본성(2)
  글·L E. 맥스웰 (1895~1984 프레리 성경학교 설립자 / 번역·김영균(진리침례교회 목사))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같이 의로우며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요일 3:6~9)

본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과 설명들이 주어진 바 있으나 그 어느 것 하나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은 없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본문의 교리적 해석에 주안점을 두다보니 요한서신의 기록 목적을 등안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와의 체험적 교제

요한이 이 서신을 기록한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체험적인 교제”로 이끌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은 교제의 조건은 매우 실질적이면서도 매우 엄격하다. 즉 합당한 믿음과 합당한 행실이 그것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지어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한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성결”을 내세우는 자들은 본 구절의 앞부분을 강조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뒷부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먼저 우리 집안부터 청소하도록 하자.
 
우리는 A. J 고든(Gorden) 박사의 지혜로운 발언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자 한다.
성경에 계시된 신성한 진리는 종종 두 개의 극단 사이에 놓여 있다. 따라서 가장 심각한 오류는 성경의 한 극단적인 구절을 가지고 또 다른 극단적인 구절을 거부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은 죄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정죄한다면 죄 가운데서 불완전한 상태에 만족하려는 자들은 더 커다란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 같이 의로우며”(요일3:7)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을 자랑하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는 자들을 바로 잡아주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와 “죄안에서”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요한은 “그분 안에는 죄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요한은 다음 구절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요일 3:9)

그릇된 이해

이와 같은 말을 한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대체적으로 선한 삶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사실로 만족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다. 이미 거듭난 사람을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끌고자 할 목적으로 요한 서신을 기록한 요한의 의도는 이보다 훨씬 깊다. 혹자는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으로서는 죄를 짓지 못하며 오직 옛 사람만이 죄를 짓는 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극단적 생각은 그리스도인은 그 안의 죄가 완전히 뿌리 뽑혀져 자동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이 그런 억지주장과 결코 일치한다고 할 수 없다.

바른 이해

먼저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Is born)라는 표현의 시제가 현재임을 주목하기 바란다. 여기서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는 자의 과거의 중생체험이 아니다. 요한은 하나님께로 태어났기 때문에(was born of)라고 하지 않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즉 과거에 거듭난 사람이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상태로 이 조건하에서만 이미 거듭난 성도가 하나님의 교제를 체험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설명해보자면 요한은 우리가 영적 선택을 할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으로 “태어나면” 그때는 그 상황에 관한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죄를 지을 수 없다”는 표현은 요셉이 육신을 따를 것인가 성령을 따를 것인가의 선택을 할 순간(창 39장)의 상황을 잘 예시해 준다고 하겠다. 요셉은 그 순간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있겠느냐?”

이 순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씨가 그의 속에 머물러 있음이요- 그는 죄로부터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육으로 더럽혀진 의복조차 미워”했던 것이다.(유 23) 그 순간 요셉은 분명히 “죄를 짓지 않았다.” 요셉은 그의 행동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태어났다.”(그 순간 말씀의 씨앗으로, 그 분의 씨앗으로) 따라서 나는 죄를 지을 수 없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매일 매일 육신과 성령 사이에서 선택해야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즉 옛 사람과 새 사람 중에 어떤 사람으로서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매일”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새로운 의무는 새로운 죽음과 부활을 날마다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믿는 자가 태어나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때 이를 위한 새로운 빛이 새로운 복종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길을 비추어 줄 것이다.

보장된 승리 안의 점진적 승리

앞서 언급했던 가나안 땅에 관해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 땅은 열매가 풍성한 땅인 동시에 치열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던 땅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축복의 땅은 이미 그들의 유업이 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영적인 축복”을 이미 받았다. 그러나 여호수아에게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을 모든 곳은 내가 너희에게 준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한 약속이 주어져 있다. 여호수아가 그의 대적들의 목을 발로 밟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 역시 우리의 지체들을 즉 “몸의 행실들”을 죽여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한 번에 모두 점령하라고 하셨는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일 년 내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않으리니, 이는 그 땅이 황폐하게 되고 들짐승들이 너를 대적하여 번식할까 함이라.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이어받을 때까지는 내가 그들을 네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출 23:29,30) 우리는 평생 동안 새로운 영토를 계속해서 점령해 가야만 한다. 우선은 우리 안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저 너머에 있는 지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자기보다 더 강력한 일곱 민족과 대면하여야 했다. 그들은 전능하신 분의 힘을 힘입어서 그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옛 생명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강력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약속이 주어져 있다.

만약 당신이 성령에 의해 당신의 몸의 악습, 술책, 그리고 음모를 죽음에 처하게 한다면, 당신은 살게 될 것입니다.(Moule)

요새를 점령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우리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소유물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신다. 자, 좀 더 계속해보자. 이스라엘이 마주친 첫 번째 요새(점령이 불가능하게 보였던 것은 물론이다)는 여리고였다. 그러나 “여리고 성벽은 믿음으로 무너져 내렸으며” 또한 여호수아는 그 도시(성읍)안에 있었던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을 하루걸러 여러 번 점령하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일단 성읍을 점령한 후엔 이미 획득한 승리에 기초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며 굳건히 “서 있었다.” 이 여리고에 관한 한 그들은 승리를 유지했고 “죄를 범치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결정적인 요새를 점령해야 하며(예를 들면 게으름, 탐심, 이기심 그리고 무절제한 생활 등), 그 다음에는 그 옛 생활의 한 부분에 십자가를 심어 놓고서 “굳게 서” 있으면 된다. 그 요새는 이미 점령되었으므로 그곳에 거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저주받은 가나안인들과 타협을 한다든가 거짓 평화동맹을 맺는다면 사탄이 그의 “철병거”를 내세우며 서 있는 “산당”을 재탈환하기 위해 다시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여부스족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조롱하고 그들에게 도전을 했다. 이 요새는 지난 400여 년간 이스라엘을 대적해 왔던 유명한 요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이 시온이라고 하는 요새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 성읍은 다윗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때부터 다윗은 모든 지역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여러분의 삶에는 여러분이 입성하지 못하도록 반항하고 있는 요새는 없는가? 더 위대하신 다윗의 아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분 자신이 그 요새를 공격하고, 대적을 쫓아 내어보라. 그리하면 당신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생명 안에서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is born of God) 세상을 이기느니라.” 당신이 이겨야 할 다음 요새는 어디인가? 당신의 삶 가운데 그 어떤 부분이든 하나님에게서 “난다면”(is born) 승리는 틀림없다. 그리스도인은 매일 십자가를 대한다. 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을 통해 그는 생명의 새로움 안으로 “나는 것”이며 매번 순종이라는 방식을 통해 승리를 쟁취한다. 그리고서는 그 승리위에 굳건히 “서게“되는 것이다.(바로 이것이 그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교제를 위해 요구하시는 그 수준인 것이다). 요한뿐 아니라 바울도 동일한 견해를 밝혔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정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두 마음(본성) 사이의 모순

사랑하는 형제여! 광야에서 뼈를 깎는 고생을 하면서 가나안 땅에 이미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이스라엘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못할진대 두 마음을 품고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에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생각해 보아야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아무런 땅도 점령하지 못하면서, 젖과 꿀과 포도열매를 맛보지도 못하면서, 그리고 구속주를 위해 아무런 포로도 잡지 못하면서 고국에서의 영광만을 자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두 본성 사이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당신은 아담-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인들로부터 공물을 받으라든가 그들을 묶어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공물이 아닌 죽음에 처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모든 열매를 뿌리째 뽑아버리고서는 아무런 싸움도 하지 않으려는 그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경은 물론 당신 자신의 경험과도 배치되는 것이다. 두 가지 본성사이에서 왔다 갖다 하는 것이나 뿌리째 옛 사람을 뽑아버리고서는 더 이상의 싸움은 없다는 주장은 모든 성경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십자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하여 옛 사람을 “벗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옛 사람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다. 그분의 죽으심을 적용하라. 십자가로 하여금 거룩하지 못한 이중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당신을 부끄럽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여 그대의 마음을 정결케하라.” 십자가는 우리가 성도처럼 살도록 판결을 내린 것이다. 할렐루야! 이제는 당장 올라가 유업을 차지하자. “성령을 통하여” 이 일을 이루어내자.

침체를 벗어나는 길 - 자백과 그리스도의 피 적용

이미 타락해버린 자들을 위해 한마디 위로의 말을 하고자한다. (한번이라도 미끄러져 본 적이 없는 성도가 어디 있겠는가?) 여러분이 침체를 벗어나는 길은 오직 죄를 당장에 자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화해하실 의향이 있으시다. 우리 쪽에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무지하여 지은 죄나 실패에 대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적용할 수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항상 요한과 동일해야한다. 즉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한다.”

점령해야할 땅 - 선교

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에게는 아직도 점령해야할 많은 땅이 남아있다.” 우리의 눈을 들고 하얗게 익어 추수하게 된 밭을 살펴보자.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 가운데 아직 점령하지 못한 땅에서 너무도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전 세계에 아직도 점령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밭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프로그램과 목적에 미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오! 속히 “내란”을 마무리 짓고 세상으로 나아가자. 그리고 어린양을 위해 그분의 고통의 보상을 얻기 위해 승리를 쟁취하도록 하자. “다른 양”의 위대한 목자장 되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올 때까지 점령하고 점령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우리가 이를 소홀히 한다면 “그들도 내가 데려와야 하리라”고 하신 그 양들로 인해 심히 고통을 당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께 대해 여러 면에서 불복종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선교”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불순종이 아닐 수 없다. 탐심과 게으름이라고 하는 이 “가나안인들”은 -사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함으로써 짓는 죄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짓는 죄가 훨씬 크다고 생각 된다- 이미 교회의 생명력을 무력화시킨 지 오래이다. 현재 교회는 전반적으로 보아 “육신을 따라” 살고 있으며 “발육감퇴”를 거쳐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상태이다. 아니 이미 죽은 상태에 돌입해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음은 글로버(Glover)의 Progress of World-wide Missions에서 유명한 선교지도자인 Charles R. Watson목사(카이로에 있는 미국대학교 총장)의 발언을 인용한 것이다.
 
아직 점령하지 못한 곳을 점령하는 것이야말로 이 선교의 시대에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도전임에 분명하다. 교회가 이 도전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에 따라 중요한 문제들이 해결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기독교회가 생명력을 회복하느냐 마느냐, 수백만 인류의 행복과 복지문제, 민족들의 생활조건의 향상에 관한 문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원한 목적이 이루어지느냐 않느냐의 문제들. 점령되지 못한 곳들은 반드시 점령되어야하며 우리는 이를 위해 대가를 치러야한다. 이 점령이 현실화 되려면 먼저 우리의 삶과 마음 가운데 아직도 그리스도의 뜻에 순복하지 못하고 있는 점령되지 못한 부분들이 먼저 점령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분의 완전하신 사랑과 우리의 헌신이 요구되며 그분의 영이 역사하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완전히 점령되지 못한 부분이 먼저 해결될 때에야만 그분께서는 더 멀리 있는 요새들을 점령할 길을 여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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