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건강과 생명
과월호 보기
특집
건생주치의
건생가이드
건생캠페인
건강한 사람들
신앙클리닉
시론
문학
2011년 10월호

그녀의 자판기
  글·김재욱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은평교회. jaewoogy.com. 저서 ‘1318 창조과학 A to Z’ 등)

아내는 내가 자기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서 웬만하면 아내에 관한 것은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정말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고 외치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아내는 여느 아줌마들과 같이 건망증도 심하고 깜빡깜빡 잘 잊기도 한다. 특히 잘 정리한다고 둔 물건은 더 못 찾는다. 정리가 아니라 거의 숨겨놓는 수준이라 물건을 찾다가 안 나오면 아내한테 묻게 된다.
“당신 오늘 물건 정리했지!?”
아내 덕분에 나는 1년에 한두 번은 낮에 이런 문자 메시지를 받고 있다.
“집 번호 뭐였더라…?”
번호키에 입력할 비밀번호를 잊어 문 앞에서 못 들어가고 문자를 보낸 것이다. 그 비밀번호가 다섯 자리도 여섯 자리도 아닌 네 자리인데, 잊었다가도 누르려고 하면 손이 자동으로 갈 것 같은데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아내와 나는 디자인과 동문인데 고교시절엔 나보다 공부도 훨씬 잘한 사람이고, 복잡한 스토리의 영화를 볼 때는 나보다 더 이해가 빠르다. 아주 좋은 대학교는 아니었지만 마흔이 다 되어 편입해 공부한 사회복지학과를 올 A에 평점 4.5 만점으로 수석졸업하기도 했다.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 시험도 함께 본 같은 과 학생들 중 최고 성적으로 합격했을 정도로 노력파이고 학구적인 사람이지만 전업주부라는 특성 때문인지 일상도 생각도 기억력도 정돈이 안 되는 것 같다. 한마디로 벼락공부의 귀재라고나 할까. 평소엔 로빈슨 크루소가 로빈 훗이 되고, 병자호란이 병인양요가 되는 일은 애교 수준이다.

얼마 전에는 아내가 이를 닦다가 낯선 맛과 느낌에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치약 튜브를 다시 보니 화장 지우는 폼 클렌징을 칫솔에 짜서 닦고 있었던 것이다. 원효는 어두워서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잘못 마셨다지만 전깃불 다 켜놓고 그 무슨 황당한 실수인가.
더 큰 문제는 얼마 후에 발생했다. 아내가 화장을 지우려다가 또 다시 낯선 느낌에 눈을 떠보니… 예상대로 그것은 폼 클렌징이 아니라 치약이었다. 어쩐지 아무리 문질러도 거품이 안 나더라나… 그렇게 아내는 얼굴을 미백하고 이빨의 화장을 지우는 여자다.
한 번은 아들 찬영이가 찬밥을 데운다고 전자레인지에 그릇을 넣으며,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아내한테 물었다.
“엄마, 이거 얼마나 돌려야 돼요?”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다.
“50분.”
“엥?”
나는 듣고만 있었다.
“50분? 진짜?”
아이가 되묻자 아내가 말한다
“응… 아니 아니, 50초. 어머, 나 왜 이러니.”
왜 이러는 줄은 본인도 좀 안다. 그런데 전자레인지에 50분 돌리면 밥이 폭발한다. 이래서 가끔은 아내가 무서울 때가 있다.

 아내는 젊을 때부터도 기계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다룰 줄도 모른다. 그래서 장거리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운전하고 다니는 것이 참 신기하기만 하다. 게다가 주차도 제법 잘한다. 그런데 휴대폰을 비롯한 모든 기계에 익숙하지가 않다. 컴퓨터만 해도 워드 자격증도 있고 오피스 프로그램도 배워서 다룰 줄 알지만, 결정적으로 파일을 저장하면 그게 어디로 갔는지, 이름은 어떻게 바꾸고 폴더는 어떻게 만드는지, 가장 기초적인 것을 잘 모른다.

얼마전 밤늦게까지 노트북 컴퓨터를 만지던 딸아이에게 몇 번을 경고하던 아내가 호통을 치며 다가갔다.
“너, 빨리 안 꺼!! 코드 확 뽑아버린다!!”
결국 노트북을 뺏으며 코드를 뽑았는데…… 아내가 뽑은 건 꽂혀 있던 USB포트였다. 당연히 컴퓨터가 꺼질 리 없다.
“어, 이거 왜 안 꺼져?!”
통신용 USB코드는 전원과 상관없고, 노트북은 전원 코드를 뽑아도 배터리로 돌아가는 것인데… 아이들은 이럴 때마다 웃겨 죽는단다.

아내는 오디오에 대해서도 어떤 때는 이렇게 묻기도 한다.
“음량이 12인데 왜 소리가 이렇게 작지?”
그래서 보면 아니나 다를까…
“저건 음량이 아니고 CD의 12번 트랙을 재생 중이라는 표시잖아… ”
이렇게 일일이 가르쳐줘야 한다.

하루는 아내가 휴대폰을 보는데 문자가 와 있고, 급히 연락을 해야 하는데 마침 배터리가 다 된 것이었다. 아내는 여기저기 다니며 충전기와 전깃줄을 찾았다. “줄, 줄 어디 갔지?” 하며 돌아다니다 드디어 찾아서 플러그에 꽂았는데… 갑자기 ‘띠-리-리-리-’ 하며 음악 소리가 난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적잖이 당황했다. 아내가 휴대폰 충전을 한다며 가져간 것은 휴대폰 충전기가 아니라, 봄이 돼서 빼놓은 온돌마루 전기장판에 연결하는 하얗고 굵은 줄에 큼직한 조작판이 달린, ‘완전히’ 다른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갖다 끼우니 조작음이 난 것이었다. 단지 전기 플러그가 달렸다는 것 외에는 혼동할 일이 없는 물건을 들고 가는 모습을 보니, 남들 다 낙하산 지고 뛰어내리는데 혼자만 책가방 메고 뛰어내리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런 일들에 내가 웃으면 아내는 놀린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모습이 별로 싫지는 않다. 단지 부주의한 상황에서 위험한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될 뿐이다.

그런데 어떤 때 보면 아내는 나를 자판기로 아는 것 같다. 까칠한 고참병이 이등병 옆구리를 찌르면 관등성명이 자동으로 나오듯이, 아내는 필요한 것, 궁금한 것, 잊어버린 것은 다 나를 쿡 찌르면 나오는 줄 안다. 심지어 자기 휴대폰 번호를 물을 때도 있다(그러면서도 늘 당당함).
그런데 알아서 대답하고 챙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건망증은 점점 심해진다. 휴대폰과 내비게이션 때문에 디지털 치매가 생기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안 그래도 기억할 것이 많은 세상에서 가능하면 단순해지려는 우리의 머리가, 당장 몰라도 되는 것은 자꾸 피하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도 부엌일은 정말 익숙해지지 않는데, 아내가 집에서 알아서 해주다 보니 익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 것과 비슷한 원리다.

부부는 거의 모든 면에서 서로 보완을 하면서 살기 마련인 것 같다. 나도 내 일을 할 때 외에는 그리 꼼꼼한 편이 아니지만 아내와 있으면 정신을 차리게 되는 편이다.
남자가 평균수명이 짧기도 하고, 내가 아내보다 1년 이상 연식(?)이 더 됐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아내보다 먼저 육신의 장막을 벗고 주님 앞에 갈 것 같다. 아내가 잔소리를 할 때면, “나중에 나 없어 봐… 당신은 아무것도 못할 테니…” 하고 협박 아닌 협박도 하지만 사실 쓸데없이 미리 걱정이 되기도 한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 비디오 레코더를 켤 때마다 리모컨 조작을 못해서 아들을 찾는 노인이 나오는데, 그의 아들인 주인공은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사실을 알고 난 후 비디오 조작법을 종이에 상세히 적어 아버지에게 다시 설명한다. 그조차도 못 알아듣자 아들은 화가 나서 나가버린다. 아버지보다 먼저 가야 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서였다.

사실 정말 부족한 사람은 나다. 늘 그것을 채워주며 손해를 보는 사람은 아내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로 알고 늘 감사하고 있다. 그래도 자판기(?)인 내가 없으면 아내도 꽤 불편할 것이다. 어떤 부부도 한 날 한 시에 같이 갈 수는 없으니… 내가 먼저 간다면, 그리고 아내를 위해 위 영화의 주인공처럼 뭔가 설명서를 써놔야 한다면 두툼한 매뉴얼 북 한 권 쯤은 남겨야 하지 않을까???





[Copyright ⓒ 건강과 생명(www.healthlife.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컨텐츠 사용 문의 및 저작권 문의

Untitled Docu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