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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호

소년과 귀뚜라미
  글·조임생 (동화작가. 시인. 여의도순복음교회)

아파트 위에 걸린 하늘이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습니다. 놀이터에선 아까부터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키가 작은 은하가 폴짝폴짝 고무줄을 넘고 있는 중입니다. 술래인 미라가 고무줄을 잡고 있다가 다급히 소리칩니다.
“얘들아, 꾸러기가 온다!”
철이 입니다. 건들건들 이쪽으로 오는 게 틀림없습니다.
“훼방 놓기 전에 그만하자.”
여자아이들은 재빨리 고무줄을 걷었습니다.
“야, 이은하!”
“왜 그래?”
은하가 곱지 않은 눈으로 철이를 봅니다. 속으로 다 큰 녀석이 아직도 장난질이나 하다니 딱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네 엄마가 부르니까 빨리 가 봐.”
“정말이야?”
“넌 거짓말만 듣고 살았냐?”

철이 네와 은하 네는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둔 아파트 이웃입니다. 엄마, 아빠들끼리는 서로 친하지만 은하와 철이는 앙숙입니다. 그건 모두 철이 때문입니다. 번번이 고무줄을 끊어 놓거나 살금살금 등 뒤에 다가와 ‘꽥!’ 소리를 질러 놀라게 하거든요.
그뿐인가요? “딩동딩동” 은하네 벨을 눌러놓고 도망가 버리기도 잘합니다.
언젠가도 은하가 혼자 있을 때 벨이 울렸습니다. 홈 비디오엔 분명히 철이가 보였는데 문을 열어 보니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문 안쪽 담벼락에 철이가 빈대떡처럼 찰싹 붙어 킥킥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날 철이는 된통 혼이 났습니다. 참다못한 은하가 철이 엄마에게 고자질을 했거든요. 철이가 엘리베이터 앞에 꿇어앉아 있는 것이 은하는 고소하기도 하고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이었어요. 학교에서 은하는 ‘이은하 바보 천치’란 쪽지를 등 뒤에 달고 다닌 것입니다. 철이가 몰래 붙여 논 게 틀림없었어요. 아이들은 배를 잡고 킥킥거리고 은하는 눈물이 날 만큼 분했습니다.

‘피아노 학원에 갈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왜 부르실까? 저 심술꾸러기가 또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은하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너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맘대로 해, 가든 말든. 너 혼나도 난 모른다.”
철이의 능청스러움에 은하는 또 깜빡 속고 맙니다.
“히히, 자알 됐다.”
 철이는 놀이터 옆 잔디밭을 뒤지기 시작합니다.
“어디로 숨어버렸지? 요놈들 빨리 내 손에 잡히지 못해!”
어른들이 보면 잔디를 밟는다고 야단맞습니다. 풀벌레를 잡는 걸 알면 더군다나 혼이 납니다. 엊그제 준호는 풀무치를 두 마리나 잡았다 놓아 줬다고 했습니다.
‘자아식, 나 같으면 가지고 놀겠다.’
철이는 준호가 참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지요. 나무와 잔디가 다른 아파트보다 무성한 탓일까요. 철이네 아파트 화단에 풀벌레들이 찾아왔습니다.
“어머, 저 귀뚜라미 소리 좀 봐. 옛날 고향에서 듣던 그 소리야. 여치와 풀무치도 있나 봐.”
아파트 아줌마들은 좋아했지만 철이는 괜히 심술이 났습니다. 초저녁부터 벌레들이 왕왕 우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습니다.
“야, 좀 조용히 해!”
베란다에서 소리치면 뚝 그쳤다가 금방 또 울기 시작합니다. 꼭 철이를 약 올리는 것 같았어요. 철이는 풀벌레 사냥을 나섰어요. 물론 어른들이 보지 않는 틈을 노렸습니다.
특히 은하네 엄마를 조심해야 합니다. 은하 엄마는 풀벌레소리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좀처럼 도시에서 들어볼 수 없는 자연의 노래라구요.
‘바퀴벌레, 진드기가 울지 못하는 게 다행이지.’
철이는 속으로 투덜거립니다.
그때입니다. 다리가 긴 초록 풀벌레 한 마리가 겅중겅중 뛰는 것이 보였어요. 옳다구나, 철이는 그것을 손으로 홱 낚아챘습니다.
‘헤헤, 드디어 걸렸구나.’
저만큼 화가 잔뜩 난 은하가 뛰어 옵니다.
“야, 이 거짓말쟁이, 심술꾸러기! 우리 아빠한테 일러 혼내 줄거야!”
철이는 빙글빙글 웃고 있습니다.
“좋아, 난 ‘바보 천치’를 열장쯤 써 놓을 거야. 매일매일 네 등에 붙여 주게.”
은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지난번 망신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런 개구장이와 싸워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합니다. 은하는 철이를 달래듯이 곱게 타이릅니다.
“너 정말 그러지 마.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러니까 네가 먼저 잘해 봐. 공부 좀 잘 한다고 우쭐대지 말고.”
은하는 기가 막혔지만 참습니다.
“알았어. 앞으론 조심할게.”
“으흠, 진작 그럴 것이지.”
철이는 신이 나 죽겠다는 표정입니다.
“그런데 너 손에 그거 뭐야? 풀벌레 잡았구나.”
“아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철이는 황급히 오른손을 등 뒤로 감추었습니다.
“걱정 마. 엄마한테 안 이를게.”
“정말이지?”
“응, 약속해.”
철이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눈치입니다.
“이거 방아깨비야. 잘 봐, 이렇게 발목을 꼭 잡고 있으면 엉덩이로 방아를 막 찧는단다. 재미있지?”
그러나 은하에겐 방아깨비가 살려달라고 사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은하는 그만 이마를 찡그리고 맙니다.
“방아깨비를 어쩌려고 잡았니?”
“가지고 놀려고.”
“얘. 그거 놓아주면 안 되겠니? 저 풀밭 속에 조그만 풀벌레가 산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 내가 아이스크림 사줄까? 삼촌이 사준 내 동생 게임기도 빌려줄게. 응?”
철이는 망설입니다. 아이스크림도 좋지만 은하네 삼촌이 사 준 게임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잘 알고 있거든요. 은하 동생 은구가 손도 못 대게 해서 한바탕 쥐어박아 준적도 있었지요.
‘그렇지만, 애써 잡은 걸 놓아주긴 싫고….’
옳지, 좋은 꾀가 생각났습니다.
“은하야, 준호에게만 보여 주고 놓아줄게. 약속해.”
“정말이지?”
“그으럼.”
은하가 돌아가자 철이는 신이 나 겅중겅중 뜁니다.
“히잇,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은하는 너무 착해 탈이라니까.”

집엔 아무도 없습니다. 엄마는 할머니 댁에 가셨거든요. 오늘 또 학원 빼먹은 걸 알면 엄마가 펄펄 뛰실 거예요. 그렇지만 조기 영어교육인지 뭔지는 정말 싫거든요. 철이는 거실에 퍼질러 앉아 방아깨비에게 엉덩이춤을 추게 했습니다. 엉덩이를 까딱거리며 춤을 추던 방아깨비가 옆으로 픽 쓰러집니다.
“야, 춤 더 추란 말야.”
철이는 연필심 끝으로 방아깨비의 허벅지를 꾹꾹 찌릅니다. 방아깨비는 비틀비틀 일어나다가 또다시 쓰러지고 맙니다.
“에이, 재미없어.”
철이는 실끝으로 방아깨비의 다리를 묶어 책상다리에 매어 놓고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눕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철이와 은하는 넓은 벌판을 헤매고 있습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오는데 집도 불빛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여기가 어딜까?”
“이상하다. 우리가 왜 여기 있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파 더는 걷기도 힘이 듭니다. 마침 둥그스런 바위 등이 보이기에 두 아이는 그 위에 걸터앉았습니다.
“아야!”
갑작스런 비명 소리에 두 아이는 깜짝 놀라 뒤로 나뒹굴고 맙니다. 바위가 흔들리면서 일어서는데 그것은 커다란 귀뚜라미였어요.
귀뚜라미는 눈알을 디룩디룩 굴리며 두 아이를 노려봅니다.
“너희는 누구냐?”
“우린 사람이예요,”
은하가 공손히 대답합니다
“난 사람을 많이 봤어. 그렇지만 너희들처럼 쪼그만 꼬마는 처음이야.”
“귀뚜라미님은 동물원의 낙타만큼 크네요.”
“웃기지 마. 난 그대로 나야.”
귀뚜라미는 고개를 흔듭니다.
“우린 사람이 틀림없다구요.”
철이가 힘주어 말합니다.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무슨 귀뚜라미가 저렇게 하마처럼 큰지. 귀뚜라미는 목을 뒤로 젖히며 껄껄껄 웃습니다.
“오호라, 너희는 사람을 닮은 새로운 곤충이군 그래. 사람의 아이는 갓난아기라도 나보다 백배는 클 걸. 너희는 아기 손가락만큼 작구나.”
철이와 은하는 그제야 자기들이 아기 손가락만큼 작아진 것을 압니다.
“으아앙.”
은하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철이도 볼이 실룩거립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선생님, 개구장이 심술첨지 말썽꾸러기가 드디어 벌을 받습니다. 엄마, 나를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 은하는 착하니까 벌을 주시면 안 돼요. 은하를 돌려보내 주세요. 네?’
철이는 난생 처음 기도를 드립니다.
“은하야, 울지 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잖아.”
그러나 은하는 울음을 그칠 줄 모릅니다.
“귀뚜라미님, 얘 이름은 은하고 내 이름은 철이예요. 우린 진달래아파트에서 살아요. 우릴 제발 집 앞까지 데려다 주세요.”
철이의 말에 귀뚜라미는 눈을 부릅뜹니다.
“뭐, 네 이름이 철이라고?”
철이란 놈은 아주 몹쓸 놈이지. 우리 친구를 잡아갔거든. 그러고 보니 철이 녀석과 아주 닮았는 걸?”
은하가 철이를 바라봅니다. 그 눈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 왜 약속 안 지켰니?’
철이는 고개를 푹 숙입니다.
귀뚜라미는 흰 이빨을 드러냅니다.
“귀뚜라미님, 용서해 주세요. 우린 정말 나쁜 사람이 아니예요.”
은하가 손을 싹싹 빕니다. 귀뚜라미는 그제야 부드럽게 웃습니다.
“그래, 넌 참 착해 보이는구나. 내 친구 방아깨비도 착한 곤충이었지. 난 노래를 잘하고 내 친구는 춤을 잘 추고. 우린 좋은 친구였어.
우린 저 아랫집에서 살다가 집을 새로 짓는 바람에 이리로 이사왔단다. 그런데 철이란 녀석이 우리를 괴롭히더니 내 친구를 잡아 가버린 거야.”
귀뚜라미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집니다.
“이웃마을에도 풀무치 형제가 잡혀갔는데, 준호란 아이는 착해서 그 형제를 돌려보내 줬다는 거야. 그런데 내 친구는 여태 돌아오지 않았어. 우린 부지런히 가을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말야. 철이 녀석, 보기만 하면 내 이빨로 물어버리고 싶어.”
철이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다리가 떨려서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도망쳐 봐야 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귀뚜라미야말로 뜀박질 선수이거든요.
“귀뚜라미님, 우리를 아파트 앞에 데려다 주세요. 꼭 친구를 구해올게요.”
은하가 말합니다. 그러나 귀뚜라미는 고개를 흔듭니다.
“사람은 너희들 같은 꼬마를 그냥두지 않을 걸. 이상한 곤충이라며 상자 안에 가두고 구경거리로 만들거야. 사람은 원래 구경거리를 좋아하거든.”
“아니예요. 그럴 리 없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엄마는 날 알아보실 거예요.”
은하가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귀뚜라미는 무언가 잠시 생각하는 눈치입니다.
“너흰 정말 사람이야? 믿어지지 않는 걸.”
“아니에요, 정말이예요.”
“넌 철이가 분명하고?”
“… 네.”
귀뚜라미는 철이를 노려봅니다.
‘이젠 죽었구나’하고 철이는 생각합니다. 저 튼튼하게 생긴 긴 다리로 한바탕 후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럼 저만큼 나가 떨어져버릴 거야. 간이 콩알만해집니다.
은하가 놓아주랄 때 그만 방아깨비를 놓아줄 걸 후회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한참 생각하더니 귀뚜라미가 말합니다.
“좋아, 너희가 왜 이렇게 작아졌는지 모르지만 은하는 내 등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줄게. 하지만 철이 이놈, 너는 안 돼.”
“귀뚜라미님, 제발 철이도 보내 주세요. 철이가 가야 친구를 데려 올 수 있잖아요. 철이도 본시 착한 아이니까 다신 그런 짓을 안 할 거예요.”
은하가 사정을 하자 귀뚜라미도 마음이 움직였나 봅니다. 철이는 은하가 너무 고마워 눈물이 다 날 지경입니다.
“좋아, 은하 말대로 하지. 철이 너는 내 친구를 꼭 놓아주어야 해. 앞으로 풀밭을 마구 헤치거나 돌을 던지면 안돼.”
철이는 눈물이 글썽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귀뚜라미는 두 아이를 등에 태우고 달립니다. 쌩쌩 바람이 얼굴에 와 부딪칩니다. 그 전엔 허리께까지 오던 아기 전나무가 커다란 고목처럼 보입니다. 아파트 잔디밭이 이렇게 넓은 줄은 정말 몰랐어요.
철이는 이 마술의 잔디밭만 벗어나면 꼭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거라고 믿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계시는 따뜻한 집이 꿈속처럼 그립습니다.
드디어 화단 턱에 닿았습니다.
“꼭 잡아!”
귀뚜라미는 화단 턱을 뛰어내립니다.
“엄마아!”
철이와 은하는 그만 화단 턱에서 굴러 떨어집니다. 그것은 절벽만큼이나 높았습니다.
“엄마, 살려주세요!”
비명 소리가 목구멍에 걸립니다. 아무리 외쳐도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아슬아슬 화단 턱에 매달린 철이는 세상이 그저 노랗기만 합니다.

“철이야, 철이야!”
누가 어깨를 흔들어 철이는 번쩍 눈을 뜹니다.
“웬 낮잠을 이렇게 자니? 저런, 무서운 꿈을 꾸었나 보구나.”
엄마였어요.
철이는 벌떡 일어납니다. 주위를 한바탕 휘둘러보고 자기의 몸을 살펴보고 허벅지를 꼬집어봅니다.
“엄마, 내가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다니, 뭐가?”
“아, 아무것도 아니예요. 휴~, 꿈이었구나.”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엄마, 방아깨비는요?”
“방아깨비라니? 이 녀석이. 학원에는 안가고 또 풀벌레 잡았구나! 그런 짓 하지 말랬잖니?”
“그럼요. 다신 안 할 거예요. 나 방아깨비 놓아주고 올게요.”

“철이야, 어디 가?”
은하입니다. 은하가 천사처럼 예쁘게 보입니다.
“나 이 방아깨비 놓아주려고.”
“그래, 빨리 와. 내 동생한테 허락받았단다. 게임기 빌려주기로.”
철이는 뒷머리를 긁적입니다. 부끄럽고 또 미안합니다.
“은하야, 저 있잖아. 나 게임기 필요 없어.”
“너 그거 좋아하잖아?”
은하의 눈이 동그래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그리고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이 개구장이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
은하는 긴장합니다.
“내 친구 이은하에게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 사주고 싶어. 딱 한 개만.”
“뭐? 호호호.”
은하가 입을 가리고 웃습니다.
“이얏호!”
철이는 겅중겅중 풀밭으로 뛰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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