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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호

빨간 오뚝이의 꿈, 사랑
  글·최원현 (수필 문학가. 칼럼니스트. 사)한국수필가협회 연수원장. 청운교회 )
건들면 산사의 풍경소리를 냈다. 뒤뚱뒤뚱 넘어질듯 하다가도 스스로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섰다. 뾰족한 코를 자랑하며 똥그랗고 까만 눈으로 날 쳐다보곤 했다. 잘 있었니? 인사를 하면 녀석은 그런 내 인사엔 아랑곳도 않았다. 나비넥타이를 뽐내며 몸을 앞뒤로 한 번 흔들어 대고는 보라는 듯 차렷 자세를 하며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는 빨간색을 별로 좋아 않는다. 그런데 이 빨간색 오뚝이는 이상하게 정이 간다. 빨간색인 것이 더 귀엽고 사랑스럽다. 자주 보진 않았더라도 삼십년을 내 집에 함께 있었기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지금은 결혼하여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들의 돌때쯤 제 이모가 이 오뚝이를 사다 준 것이니 꼭 삼십년이다.

장난감이 많지 않던 때라 아이가 더없이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 맘대로 걸을 수 있게 되자 이내 다른 곳으로 관심이 돌아가 버렸고 오뚝이도 당연 그의 눈에서 밀려나 혼자가 되었었다. 그런데도 그 오랜 세월 동안 버려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던 것이다. 지난 번 잠시 귀국했던 그 아들아이의 딸이 제 아비가 저만할 때 갖고 놀던 이 오뚝이를 한참동안 갖고 놀기도 했다. 대물림의 장난감, 여러 번 이사를 했고 그래서 그때마다 쓰지 않는 것들을 그렇게 많이 버렸음에도 녀석이 용케 남아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27년간 살던 아파트를 재건축 하게 되어 지금의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 이삿짐을 싸는 중에 상자 속에서 이게 나왔다. 그때도 이젠 그만 버리자 생각을 했었으나 그래도 유일하게 남은 아들아이의 옛날 아기 때 장난감이란 생각에 다시 챙겼던 것 같다.

아들아이와 손녀는 금방 미국으로 다시 떠나갔다. 그러나 오뚝이는 떠나가 버린 아들 대신 딸아이의 딸들이 함께 노는 친구가 되었다. 건들면 산사의 맑은 풍경소리를 내는데다 저 혼자도 몸을 잘 추스른다. 그 빨간 오뚝이를 보고 있으면 나도 ‘녀석 참!’ 하며 자세가 가다듬어지기도 하고 그 모습을 보며 힘을 얻기도 한다. 빨간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이기에 더 눈에 잘 들어오는지도 모르겠지만 볼 때마다 어릴 때 아들아이가 갖고 놀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 미소가 어리곤 한다. 그런데 문득 이 오뚝이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하는 실없는(?) 궁금증이 일어난다.

사실 빨강이란 여성의 색상이다. 여자 화장실 표시가 빨강색이며 한복의 치마나 저고리 옷고름도 빨간색이 많다. 그렇다면 빨간색인 우리 집 오뚝이도 여자일까. 남자인 아들아이는 아주 잘 갖고 놀았는데 여자인 손녀들은 아들만큼은 잘 갖고 놀지 않는 데도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빨간색은 따뜻한 느낌이 드는 색상이다. 빨간 스웨터나 목도리를 하면 한 겨울에도 다른 색상의 것보다 훨씬 따뜻해 보인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온수 수도꼭지도 빨간색인데 색깔만으로도 뜨겁다는 것을 알게 한다. 따뜻하거나 뜨거운 것의 상징만이 아니라 생명의 색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사람 몸속의 피도 빨간색이다. 바로 생명의 상징이다. 죽으면 까만색이 된다.

추억이란 지난 것에 대한 그리움이지만 살아갈 날에 대한 소망이기도 하다.

아들아이가 30년 전에 갖고 놀던 빨간색 오뚝이도 30년이라는 시간공간에 우리 모두를 함께 불러 모으는 것 같다. 아들아이는 지금 이국(異國)에서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결혼 한 달 만에 떠난 고국, 산 설고 물 선 나라에 삶의 닻을 내린지 3년, 그 사이 딸아이가 태어났고 유학비자가 취업비자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겪었을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나 그는 어린 날 갖고 놀던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일어나고 흔들리다가도 똑바로 몸을 추스르는 그의 동작까지 생활화 했을 것이다.

그게 그의 삶이고 그게 그의 길일 터였다. 그러고 보면 이사 때문에 30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된 오뚝이라지만 우연이 아닌 것 같다. 하필 그가 잠시 귀국했을 때에 맞춰져 그와 그의 딸이 만져볼 수 있었으니 그걸 다시 보고 만져 본 아들아이나 그의 딸에게도 분명 어떤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떠나버린 후 남겨진 오뚝이를 보는 나는 또 어떤가. 힘들어 할 그와 가족을 생각하다가도 오뚝이처럼 일어나겠지 생각이 든다. 33개월, 14개월짜리 두 외손녀가 와서 갖고 놀 때는 어릴 때의 아들아이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하찮고 작은 것이라도 의미가 부여되면 소중하고 값진 것이 되는 것처럼 오뚝이도 가족의 의미를 생각게 하느라 나와 함께 있는 것만 같다.

그런 내게는 그리움이 또 하나 있다. 외할머니다. 조실부모한 내게 외할머니는 어머니기도 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버린 내가 가끔씩 찾아뵈던 할머니, 그 할머니를 뒤로 하고 서울로 되돌아오는 길엔 꼭 저녁노을이 있었다.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기 위해 떠나는 시간이 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시던 할머니의 얼굴을 노을이 비추고 있었다. 아마 할머니는 울고 계셨을 것이다. 흘리는 눈물까지도 빨간색으로 만들었을 노을, 나는 그런 할머니와 멀어지려 지는 해를 향해 힘껏 달렸고 한참 가다 바라보면 그 붉은 덩어리를 산이 꿀꺽 삼켜버리곤 했다.

그렇게 넘어가 버리던 저녁 해의 색깔과 오뚝이의 색깔이 시간의 간격을 떨쳐버린 채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나와 아들아이 사이의 30년, 아들아이와 지금 오뚝이와의 30년이 한 자리에 선 것이라고나 할까. 그렇고 보면 빨강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던 순간에도 피돌기처럼 내 속에 살아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왜 나는 빨간색을 의식적으로 싫어했을까. 그건 아무래도 내 성격이 갖는 성향이 그렇게 열정적이고 돌발적이며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에는 쉽게 적응하지 못해 보는 순간 섬뜩함을 느끼곤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그 빨강의 힘속에 빨려들어 가 있었고 그것은 내게 또 하나의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었을 것 같다.

서울에서 저녁노을을 보기는 쉽지 않다. 어둠을 기다리는 온갖 불빛들이 노을을 볼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단 한번을 보았을지라도 떠오르는 아침 해보다 저녁노을은 더 강하게 사람들의 기억을 흔든다. 빨강이 주는 생명력, 금방이라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생명의 씨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생동감이 눈을 자극하고 순식간에 가슴 속까지 흔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사랑을 빨간색 하트로 표시한다. 빨강은 살아있음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험하기도 하다. 살아있음의 힘, 운동력은 어떤 일을 일으킬지 모르잖는가.

거실 소파 옆에서 숨죽이고 있던 오뚝이를 탁자 위로 올려놓는다. 졸고 있던 게 아니라고 변명이라도 하듯 몇 번 끄덕이다 똑바로 선다. 청아한 울림도 짧은 여운으로 잦아든다.

그래 아들아, 지금은 아주 많이 힘들겠지만 너도 분명 잘 일어날 거다. 네 가슴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계획과 네가 꿈꾸는 것들이 그만큼 힘든 과정을 겪어야 이뤄지는 것들일 것이다. 네가 갖고 놀던 이 오뚝이도 너와 같은 마음일 게다. 30년을 숨죽이며 말 한 마디 못하고 살았지만 지난 번 네 손길을 다시 받으면서 다시 30년 그리고 또 30년의 꿈을 품었을 게다.

빨간색 오뚝이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본다. 아들아 사랑한다. 너와 네 가족과 네 꿈 모두를 사랑한다. 끄떡이는 오뚝이가 어느새 아들의 모습으로 바뀌어 웃고 있다. 아무 염려 말라는 듯. 빨간색 오뚝이를 쓰다듬는 나의 손에서 아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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