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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호

눈빛
  글·최원현 (수필 문학가. 칼럼니스트. 사)한국수필가협회 연수원장. 청운교회 )
“아이고 어떻게 요로콤 소식도 없이 온다냐? 요로콤 오니께 더 반갑기는 허다만 어서 오그라 내 새끼” 문을 열고 들어간 내 손을 잡은 이모의 눈은 어느새 젖어 있었다. 이 년 전 당신의 손자 수발로 서울에 오셨을 때 뵈었으니 그리 오래된 건 아니건만 이모는 내 손과 아내의 손을 함께 잡고 놓을 줄을 모르신다.

금년도 가을이 다 가건만 바깥바람 한 번 못 쏘인다고 아내는 투정을 해댔다. 그러나 나만 바쁜 게 아니라 아내 또한 어찌나 바쁜지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내가 힘들어 하는 표정이라도 지으면 일을 안 줄인다고 공격을 해댔다. 좀 쉬고 싶다며 직장까지 조기 퇴직을 해놓고 무슨 짓이냐는 거였다. 자기도 퇴직을 했으니 한 2년만 다른 거 다 접어두고 여행이나 하자고도 했다. 하지만 퇴직 후 바로 연결되어버린 각종 강의며 글쓰기들을 아내 말대로 2년쯤 쉰다고 하면 그 후엔 다시 시작하기가 어려울 것이 자명한데 쉽게 아내의 말을 따를 수도 없다. 해서 지난 1월 아들네가 있는 미국으로의 한 달간 여행도 아내 혼자 다녀왔다.

가만 생각해 보니 아내에겐 미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가 표현을 잘 안 해서 그렇지 마음은 그런 게 아닌 데도 아내는 그런 내 마음은 모르는지 늘 자기를 무시한다 하고 내 맘대로만 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싹싹하게 말 한 마디 해지지 않는다. 남에게는 그러지 않으면서 왜 자기한테만 그러느냐고 하지만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다. 근래 들어 내게 해대는 아내는 전의 아내가 아니다. 나이가 들면 여성은 여성호르몬이 줄어들어 남성화 되고 남성은 남성 호르몬이 줄어 여성화 된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짧은 여행을 가게 되어도 늘 의견이 맞지 않았다. 정확하고 사전 준비적인 나와 즉흥적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의견이 부딪힐 때가 너무 많다. 그냥 남편 하자는 대로 하면 자기도 편할 텐데 그러지 못하는 아내나 그까짓 거 아내 하자는 대로 해주면 될 텐데 그러지 못하는 나나 똑같지만 그래도 남편 위신 좀 세워 주면 좋을 법 한데 우리 집엔 남녀평등이 너무 강한 것 같다.

그러던 차에 마침 강의를 한 주 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해서 아내의 시간을 물으니 자기도 조정하면 되겠다고 한다. 그렇게 남쪽으로 떠나보자고 합의를 봤다. 그런데 남쪽이라고 하고 보니 걸리는 게 있다. 바로 두 분 이모님이다. 맏이인 내 어머니 밑으로 외할머니는 딸만 둘을 더 두셨다. 내 나이 세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나는 그 이모들에게서 많이 채우곤 했다. 그런 이모님인데 내가 이만큼 커버렸다고, 나도 손주까지 보아서 내 식구 살피기도 어렵다고 아주 자연스레 잊고 살 때가 많았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선 늘 숙제 못한 학생처럼 마음이 떫었다.

아내가 먼저 이모 이야기를 꺼내 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아내는 얼마나 더 사실지도 모르고 살아계실 때 언제 또 찾아뵐 수 있을지 모르는데 우리 여행은 또 갈 수도 있을 테니 반가워하실 수 있을 때 찾아뵙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사실 내 마음엔 벌써부터 여행계획 속에 이모님을 넣어 놓았었지만 아내의 말을 들으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여행일정을 재점검 했다. 두 분 이모님과 하룻밤씩을 자고 와야겠다는 생각이다. 먼저 광주에 계신 이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내려가면 저녁식사 시간까진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로(목포)의 큰 이모께는 전화를 드릴 수 없었다. 이모 성격에 내가 그곳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분초를 재며 기다릴 것이 빤하고 또 모처럼의 여행이라 일정이 어찌 변할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가게 되면 그 조금 전에 연락을 드려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떠나는 장거리 여행이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고창 장성을 지나 광주에 도착하니 이종 동생 3형제 중 둘째가 저희 집으로 어머니를 모셔다 놓고 형제 가족들을 다 초청해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이모는 나를 보는 것보다 자식들 형제가 다 모여 한 자리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그게 다 내 덕이라며 좋아 하신다. 핏줄이란 이래서 좋은 것인가 보다. 이모는 가까이 살면서도 좀처럼 다 함께 모이기도 어려웠는데 이렇게 아들 셋의 가족 열둘이 다 모인 것이 너무나 좋은 것 같다. 그렇게 나를 포함 열다섯 식구가 푸짐한 식사를 했다. 그런 후 이모님 댁으로 가 이모님과 한 방에서 얘기를 나누다 늦게야 잠이 들었다.

이번 여행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내 어릴 때 가장 정을 많이 준 막내이모님과 작별하는 내 눈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이모의 눈을 바라보니 이모의 눈에도 이슬이 맺혀있다. ‘고맙다. 니가 이렇게 찾아준께 너를 볼 수 있제 안 그러면 너를 볼 수나 있겄냐’ 이모의 눈빛은 내 어머니의 눈빛이다.

그 이모님의 눈빛을 뒤로 하고 큰 이모님께로 가는 길에 화순 벌교 담양을 거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내가 살던 마을까지 들러 가기로 했다. 마침 학교가 파하는 시간이어서 아이들이 나왔다. 전교생이 600명이 넘던 학교는 그 사이 분교가 되어 있었고 그나마 학생이 없어 아이들 말로는 내년이면 폐교가 된단다. 너른 운동장이 쓸 데가 없었다. 전교생이 열여섯이란다. 졸업한지 45년이니 그때의 것이 어디 있으랴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에 정성스레 지금의 모습이라도 카메라에 담았다.

고향마을도 둘러보았다. 그러나 내가 태어났던 집은 개축을 하여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우리가 지어 살던 집 자리엔 공장이 들어서 있었고 외조부모님과 중학교 3년을 살았던 집은 원래의 밭으로 돌아가 있었다. 가슴 한 쪽이 텅 빈 것 같았다. 세월 탓이 아니다. 그간 연고가 없다고 정을 끊고 살았던 결과다. 새삼 세월을 느끼게 한다.
큰이모님 댁으로 차를 몰았다. 전화를 드리니 이모님 댁인 일로에 계실 줄 알았는데 딸네가 사는 목포에 가 계시단다. 동생네도 함께 볼 수 있을 테니 어쩜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길이 좋아 가는 데는 얼마 안 걸려 도착했다. 아마 이모님은 내 전화를 받자마자 저녁 준비를 시작하셨을 게다.

어머니가 안 계신 내게 이모님은 늘 특별한 존재였다. 이모님의 손은 여전히 따스하다. 안색도 아주 좋으시다. 날 대접하겠다고 준비하던 손길이련만 내 손을 놓을 줄 모르신다. 큰 이모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출가를 하셨다. 그러니 나와는 함께 해 볼 시간도 없으셨다. 그런데도 큰이모에게서 어머니가 더 잘 느껴진다. 큰 이모가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을 것 같다. 저녁 먹는 내내 나를 쳐다보시는 이모님에게서 또 한 번 어머니를 느낀다.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결혼식 때 오셔서 천명이 넘는 하객들을 보며 펑펑 눈물을 쏟으시던 이모님, 당신도 힘드셨을 세월 내내 조실부모한 나를 가슴 한 쪽에 담으시고 당신 자식과 함께 자나 깨나 마음을 써 주시던 분이다. 그런데 어느새 팔순이시다. 사실 날이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자꾸만 가슴이 매어온다.

큰 딸인 내 어머니는 스물아홉에 돌아가셨다. 큰 이모도 외동딸의 나이 다섯 살 때 홀로 되셨다. 작은 이모는 아들만 셋을 낳았는데 서른여덟에 홀로 되셨다. 큰 이모부는 출근하려다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작은 이모부는 추석 전날 사무실에 놔두고 온 것이 있다며 가지러 나갔다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러니 6.25동란 중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를 포함하여 사위 셋을 모두 잃은 외할머니의 심정은 어떠셨겠는가. 그러나 세월이 약이라고 그 슬픔과 아픔을 누르고 살다보니 자녀들도 다 잘 되고 이렇게 건강하게 사시는 것이다. 이모들은 나를 보며 짠하다 하지만 그런 이모들의 삶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더 먹먹해진다. 세상에 슬픔 아픔 없이 사는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참으로 기구한 삶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일까. 서로 못 주어서 안타깝고 해주지 못해서 애가 탄다.

행사 때문에 급하게 작별을 하고 떠나오려는 내 손을 이모님은 좀처럼 놓질 못하신다. “언제 또 보겄냐?” 그 말씀 속에도 눈물이 가득하다. 나도 말없이 이모를 껴안는다. 그리고 이모의 눈빛 속에 나를 담근다. 포근하다. 따뜻하다. 편안하다. 이게 사랑이리라.

눈빛만으로도 나를 잠기게 할 수 있는 이모에게서 문득 오늘의 이만한 내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랑의 눈빛이 나를 격려하고 위로해 주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 맞다. 눈빛이다. 내게 알게 모르게 주었던 나를 위한 사랑의 눈빛들이 있었기에 어린 날에 이롭게 살면서도 춥지 않았고 무섭지 않았다. 그 별빛 같은 눈빛들 속에 이모님이 큰 별로 계셨다. 오늘 그 별빛을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 이모님의 눈빛 속에서 또 한 번 어머니의 눈빛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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