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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호

고추밭에 불타는 노을
  글·조임생 (동화작가. 시인. 여의도순복음교회)
섬돌 위에 걸터앉은 아버지는 담배만 태우십니다. 삼년 전 폐가 나쁘다고 어렵사리 끊었던 담배인데. 아버지의 구부정한 등허리에 저녁 햇살이 붉게 비끼고 있습니다.
“꽈당!”
부엌문을 요란스레 닫으며 어머니가 나오십니다. 어머니도 심기가 불편하시긴 마찬가집니다.
“그 정도에 부엌문이 깨지겠소?”
아버지가 힐끔 어머니를 돌아보며 한마디 툭 던지십니다.
“그럼 당신은 일껏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담배를 피우면 고추 값이 좋아진대요?”
어머니의 목소리에 쨍하니 금이 갑니다.
“뭐라구?”
노기 서린 아버지의 목소리, 그냥 찔끔 뒤로 물러서는 어머니.
민수는 얼른 보던 책을 덮고 쪽마루를 내려섭니다. 신발을 찾아 신는 데 복실이가 재빨리 달려와 다리에 휘감깁니다. 민수는 자신도 모르게 냅다 복실이의 정강이를 걷어 차 버립니다.
“저리 가!”
“깨갱!”
복실이가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멀뚱멀뚱 민수를 쳐다봅니다.
‘미안해, 복실아.’
민수는 속으로 사과하면서 휭하니 사립문을 빠져나옵니다. 복실이가 주춤주춤 눈치를 보며 민수를 따라옵니다.
“민수야! 저녁 먹을 시간에 어딜 가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붙듭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고샅길을 지나자 질펀하게 깔린 들판이 나옵니다. 개울을 건너고 좁은 농로를 따라 언덕배기로 조금만 올라가면 온통 고추밭 천지입니다. 민수네 마을 고추밭은 개울 건너부터 앞산 자락까지 수천 평이 넘습니다.
올해 들어 고추농사가 잘됐다고 얼굴에 환히 웃음이 감돌던 아버지, 첫물고추만 따도 형의 대학 등록금 걱정은 덜게 됐다며 신나하던 어머니…….
올해는 유난히 가물어 전국의 고추작황은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민수네 마을은 대형 저수지가 인근에 있는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그래도 농사는 쉬운 게 아니었지요.
칠팔월 두어 달은 고추 역병과 탄저병이 돌아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병든 고추를 따 내기에 바빴고 아버지는 허둥지둥 2차 방제에 뛰어들었습니다. 유달리 뜨거웠던 올 여름 한 철,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추밭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렸습니다.
첫물 고추를 수확하던 날 넘치는 기쁨을 어쩌지 못해 흥얼흥얼 노래까지 읊조리던 아버지, 얼굴이 꽃처럼 피던 어머니.
게다가 고추 값이 금값이라는 것입니다. 매스컴에서 연일 고추 값 폭등을 외쳐댔습니다.
고추 값이 날개를 달았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었습니다. 오래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만나는 사람마다 그저 싱글벙글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며칠 가지 않았습니다.
“뭐, 고추를 수입한다고?”
보던 신문을 후르르 구겨 쥐며 벌떡 일어나시는 아버지의 서슬에 어머니의 눈이 왕사탕만큼 커집니다.
“아니, 왜 그러세요?”
어머니가 두레상에 저녁상을 차리다말고 아버지를 쳐다보십니다.
“글쎄, 고추 금이 비싸다고 수입을 한 대는구먼.”
“예?”
어머니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십니다.
“아니, 지난해 고추 값이 폭락했을 땐 강 건너 불구경이더니 그래, 올해 고추 값 좀 올랐다고 대뜸 수입부터 한 대요?”
“글쎄 말이오.”
밥상을 앞에 두고 아버지는 수저를 들 생각도 않으십니다.
“아, 식기 전에 밥부터 드시구려.”
“이 판에 밥이 넘어가게 됐소?”
아버지는 신발을 급히 꿰더니 휘익 밖으로 나가십니다. 조금 있자 어른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간간히 고함치는 소리가 담 너머로 들립니다.
공터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민수는 까치발을 하고 담 너머를 훔쳐봅니다. 공터엔 어른들 몇 분이 모여 저마다 울분을 토하고 있습니다. 철이 할아버지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쉽니다.
“망할 놈들, 우리 농부는 어찌 살라는 건지 원.”
식이네 삼촌이 대꾸합니다.
“어르신, 그 사람들 눈엔 우리가 사람으로 뵈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 어쩌겠소. 고추를 내다 팔지 않을 수도 없고.”
아버지가 탄식하며 말하십니다.
다음날 잘 익은 고추 한 가마니를 경운기에 싣고 시장에 가셨던 아버지는 반나절도 안 돼 어깨가 축 처져 돌아오셨습니다.
“아니, 왜 고추는 넘기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고추가마니를 보고 고개를 갸웃합니다.
“넘길 수가 있어야지. 값이 하루 새 반값이 된 걸.”
“예에?”
“수입고추가 원체 싸서 게임이 안 되는 걸 어째. 이 노릇을 장차 어쩌면 좋담.”
아버지는 또 담배 한가치를 빼 무십니다.
어머니는 잠자코 가마니 속에서 후끈거리는 고추를 멍석위에 펴 놓고 후다닥 바구니를 들고 일어서십니다.
“어딜 가려는 게요?”
“아, 익은 고추를 따 내야지요. 물러버리기 전에.”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그만 입을 다무십니다.
어머니의 신발 소리가 저만큼 멀어진 후에도 아버지는 감감히 하늘만 바라보십니다. 가을 하늘은 티끌 하나 없이 파랗고 뜨락에 쏟아지는 금빛 햇살이 눈부시기만 합니다. 차라리 비라도 주루룩 내렸으면.
민수네 마을은 전통적으로 태양초만 생산해 내는 마을입니다. 고추를 말리는 동안은 햇살이 금싸라기 같습니다. 이럴 때 비가 오면 정말 낭패입니다.
마당이든 길거리든 집집마다 멍석을 깔고 고추를 말리는 데 얼마나 손이 가는지 모릅니다. 햇빛이 좋아야 하고 약간의 바람이 있는 날은 더 좋습니다. 그것도 꼭지 째 말려야 고추가 무르지 않습니다.
고추철이면 행여 날씨가 궂기라도 할까봐 뉘 집 없이 여간 마음이 쓰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무얼 생각하시는 걸까? 축 쳐진 아버지의 어깨가 슬퍼 보입니다. 고추 값의 폭락, 그리고 형의 대학 등록금 고지서가 아버지의 어깨를 자꾸만 누르기 때문이지요.
민수는 질펀한 고추밭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지 바위 턱에 걸터앉습니다. 혼자 신이 난 복실이가 밭두렁을 마구 뛰어 다닙니다.
저녁햇살이 깔린 고추밭은 활활 불타는 꽃밭 같습니다. 눈이 시립니다. 아니 가슴이 시립니다.
‘저놈의 고추밭을 엎어버리던가 해야지, 원.’
아버지의 한숨 섞인 푸념이 귓전에서 맴돌다 흩어집니다.
민수는 밭두렁에서 벌떡 일어섭니다. 그리고 두 주먹을 들고 외칩니다.
“대통령 할아버지! 농부들도 좀 생각해 주세요!”
“국민 여러분, 우리 농산물 좀 애용해 주세요!”
눈물이 핑 돕니다. 산봉우리가 꿀꺽 저녁 해를 삼키자 어둠이 삽시간에 먹물처럼 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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