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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호

뒷문을 열어 놓을테니 그냥 살짝 도망가시오
  글·편집부 ()
나른한 오후였다.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어디 나가 근사한 점심을 먹을 여유가 없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늘 그랬다. 의사가 팔자 좋게 밥 먹는다고 나가기라도 하면 환자 볼 시간이 그만큼 줄어든다.

몸이 아파 병원을 찾은 사람들은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라 기다리는 걸 더욱 싫어하기 마련이다. 몸의 상태를 빨리 의사에게 확인하고 싶은 심정, 빨리 병명을 알아 치료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은 누구나 똑같다. 시간을 쪼개지 않으면 그만큼 환자를 기다리게 만들뿐이 아닌가.

그날도 대충 빵과 우유로 점심을 해결했다. 오전 내내 환자들을 보느라 피곤해진 심신을 잠깐이나마 쉬고 다시 힘을 내야 했다.

창문너머 아득한, 짓푸른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곤에 젖은 눈을 저편 하늘에 담갔다. 천근의 짐을 얹은 듯 무거웠던 두 눈이 한결 상큼해졌다.
문밖에서 누군가가 살짝 인기척을 내더니 들릴 듯 말 듯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문밖 환자의 몸놀림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문을 빼꼼이 살짝 열고는 머리만 내밀며 눈치를 살폈다.

“저, 원장님께 할 말이 있어서요.”

“어서 들어오세요.”
겨우 들어와 어쩔 줄 몰라 엉거주춤 서있는 환자에게 그는 앉으라고 의자를 권했다.

“앉아서 말씀하세요. 환자가 궁금한 게 있으면 안 되죠.”
나이보다 10년은 더 들어보이는 남자였다. 이 병원 입원환자가 대부분 그렇듯이 남자도 그랬다. 가난과 병마에 찌든 얼굴엔 깊은 주름살이 패어 있었다.

남자는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앉아 더듬기만 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안절부절 못하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문득 ‘뭔가 잘못 했구나’ 하는 반성의 마음이 들었다.

‘환자가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는 건 의사 탓이다. 의사가 어쨌길래 환자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일까.’
환자는 그 어떤 얘기라도 흉허물 없이 해야 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벽이 생겼다면 그건 실패한 의사다.

“괜찮습니다. 마음 편히 말씀하세요.”
남자는 그제서야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병에 대해 말하려 온 게 아니라는 것, 내일 모레 퇴원하게 된다는 것.

그는 이제 짐작이 갔다. 남자가 병원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말씀하세요. 무엇 때문에 그러세요. 혹시 퇴원하는데 돈이 없어서 그러세요?”

남자는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입원비가 턱없이 모자르다는 것이었다. 서무과에 가보니까 20만 원씩이나 입원비가 나왔는데 이곳저곳 사정사정해서 겨우 빌려 봐도 절반도 채 안 되더라는 것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마련할 곳도 없고 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어젯밤 뜬눈으로 달리 해결할 방법을 도저히 찾지 못해 생각다 못해 원장님을 찾아 왔노라는 말이었다.

그는 남자의 말을 끝까지 듣고는 얼굴을 활짝 폈다. 환자를 믿었다.
오죽했으면 원장을 찾아올 생각을 했을까.

“선생님, 돈이 모자라면 할 수 없지요. 퇴원은 해야 하잖아요. 있는 대로만 내시고 모자라는 돈은 나중에 돈 벌어 갚으세요.”

“박사님, 그래도 어떻게….”

“괜찮습니다. 대신 주님을 믿고 영접하세요. 그러면 다 됩니다.”
남자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의 안색을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명심하세요. 다른 환자에겐 비밀입니다.”

“원장님, 이 은혜 정말 잊지 않겠습니다. 꼭 갚겠습니다.”
그는 연신 허리를 굽히면서 눈물까지 흘리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모두 주님 덕분인줄 아세요.”

남자가 뛸 듯 진료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 돈이란 게 뭔가. 돈이 결코 사람을 지배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돈의 위세에 눌려 돈 때문에 죽고 산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라는 귀한 존재가 그깟 돈 몇 푼 없어서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도
죽어가는 현실이 아닌가.

수 십 년간 병을 고치는 의사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풀 수 없는 안타까운 문제였다. 진료실을 휘휘 오가며 답답한 가슴을 풀려고 하는 순간 서무과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차! 저 친구가 또 화를 내겠군.’
그는 짜증을 가득 담은 서무과장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무슨 말을 할지 압니다.”

“원장님, 또 입니까? 큰일입니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됩니다. 병원 운영이 안 됩니다. 원장님이 자꾸 그러시니까 돈 있는 사람들까지 없는 척하며 그냥 퇴원하려고 하잖습니까?”

그는 서무과장의 항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다른 병원과는 입원비나 수술비가 비교도 안 되게 싼 데 여기서 더 깎아주면 병원운영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서무과장 역시 원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불평이라도 해서 통제하지 않으면 끝도 한도 없다는 걸 알기에….

기실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회진하다가 처연히 벽만 바라보고 있는 입원환자를 보다보면 그는 그의 안색을 살피고는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기 일쑤였다.

“저런 돈 병이 들었군.”

“이봐요. 이 분 빨리 퇴원시켜요. 돈은 나중에 건강할 때 일해서 갚으라고 하고….”
병원직원들의 불만이 그치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직원들은 늘 그랬다.

“원장님께서 그냥 보내시면 원장님 혼자만 스타가 됩니다. 병원운영은 어떻게 할 거며 직원들 월급은 어떻게 줍니까?”
그럴 때면 원장은 특유의 농담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그머니 넘어갔다.

“이보시요들. 난 그냥 보낼 테니 당신들은 그 환자를 잡아 돈을 받으면 될 것 아니요?”
직원들의 반발이 워낙 심하면 이런저런 말로 타일렀다.
서무과장은 이날도 한바탕 훈시를 들어야 했다.

“병원의 설립목적을 알지요. 병원은 가난하고 불우한 영혼을 위해 만들어진 안식첩니다. 안식처에서 돈이 없다고 문전박대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겠습니까? 오갈 곳 없는 이들을 우리까지 내치면 정말 이들이 쉬고 병을 다스릴 곳은 없습니다.”

“원장님, 하지만 개중에는 정말로 엄살떠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할 수 없지요. 설혹 그런 분들이 있다 해도 어쩝니까. 그들의 눈을 보면 저도 압니다. 어떨 때는 돈도 있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거짓을 말하는 이도 있어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믿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서무과장도 지지 않고 협상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원장님, 말씀 잘 알아듣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주십시오. 환자들이 너도나도 원장님 방에 와서 눈물로 호소할 때는 어쩌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순간부터는 하나의 제도를 만들 테니 제발 거기에 따라주십시오.”

그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직원들이 모두들 걱정하고 있다는데 어쩔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누누이 민주적인 병원운영을 내세웠는데 혼자만 고집피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원장님, 이제부터는 담당의사의 의견과 서무과를 미리 거치지 않고는 퇴원할 수 없게 만들어 주십시오.”

“잘 알겠소. 내 그리 하지.”
다짐을 받은 서무과장이 물러나자 그는 긴 한숨을 쉬었다.

“가난한 환자들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너무 가진 게 많은데…. 이 가진 것을 정말 원없이, 그들에게 풀어주고 싶은데….”
그는 그저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막 수술을 마치고 원장실로 돌아와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을 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병원직원의 노크는 아니었다.

“들어오십시오.”
낯익은 얼굴이었다. 50대 꾸부정한 경남 거창의 농부였다. 장기입원 중이었으므로 그도 잘 알고 있는 환자였다.

‘퇴원날짜가 다가왔는데 또 돈이 없다는 말인가 보다.’
그의 짐작은 맞았다.

“내일 모레가 퇴원인데…. 입원비가 없습니다.”
거창 농부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목이 메어 제대로 말도 잇지 못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돈도 없는데 병원에 묶어둔다는 자체가 그로서는 용납이 안 됐다.

그러나 병원식구들에게 사정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서슬퍼런 병원식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농부는 정자세로 죽은 듯 앉아 원장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도저히 묘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득 한 가지 방법을 찾았다.

“자,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그럴 수 있겠소?”

“어떤….”

“그냥 살짝 도망가시오. 내가 이따 밤에 뒷문을 살짝 열어 놓을 테니 몰래 퇴원준비하고 기다리시오. 지금은 직원들이 버티고 있으니 안 되고….”

‘원장님이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자, 이제 일어나 가서 빨리 퇴원준비 하시오. 직원들이 보면 불호령 떨어집니다. 그리고 퇴원준비는 몰래 하시오. 들키면 끝장입니다.”
그는 넋 놓고 앉아있는 농부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원장님, 저보고 도망가라고 하셨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제 아무리 염치없어도 그렇지 그렇게는….”

“이봐요. 방법이 없지 않소. 입원비 다 내시겠소. 당신이 빨리 나가야 농사 열심히 짓고 입원비도 갚을게 아니오. 여기 마냥 누워있으면 누가 돈을 갖다 주오. 쌀을 갖다 주오. 당신 기다리고 있을 집안시구들도 생각해야지.”

“그래도….”

“걱정 마시오.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그리 아시오.”
농부는 여전히 긴가민가하면서 원장에게 등을 떼밀려 나갔다.

그날 밤, 그는 직원들이 퇴근하는 걸 기다려 병원 후문을 살짝 열어 놓고는 병실에 들러 사인을 보냈다.
농부는 이불이며 옷가지를 챙겨서는 다시 원장실을 찾아왔다.

“원장님, 정말 그냥 가도 됩니까.”

“왜 그리 내 말을 못 믿소. 빨리 가시오.”
원장은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있는 대로 지폐를 뽑고는 농부의 손에 쥐어주었다.

“자, 차비나 하시오. 그리고 열심히 사시오.”

“원장님….”
농부와 가족들은 그만 하염없는 눈물을 터뜨렸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책임지는 일입니다. 가서 열심히 사시오. 주님께서 지켜보고 계실 겁니다.”
다음날 아침, 서무과 직원이 원장실로 쫓아왔다.

“원장님, 환자가 도망갔습니다.”
원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힐끗 웃고만 있었다.

“원장님께서 혹시….”

“짐작대로네. 내가 도망가라고 했네.”

“아이 원장님, 그 환자는 장기입원환자라 입원비가….”

“알고 있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입원비가 없다는데….”

직원은 기가 막히다는 듯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은 다반사였다.
어떤 때는 어떤 환자가 “시골에 논밭도 없고 소 한 마리 없는 소작농이라 치료비가 없다”고 하소연하자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그의 월급으로 대신 내주었을 정도.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새빨간 거짓임을 알아차려도 그는 사람을 믿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가장 귀한 존재라고 믿었기에.

오죽했으면 일제시대 때 만난 춘원 이광수가 “당신은 성인 아니면 바보”라고 표현했을까.

그는 직원들이 소근대면 늘 다섯 손가락의 비유로 직원들의 불평을 잠재웠다.
그는 다섯 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하나님의 원리는 사람의 원리와는 다릅니다.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돈 없는 입원환자가 묶여있다고 칩시다. 그 환자는 자기가 입원비를 내지 않아 이렇게 됐다고 처음에는 생각할 겁니다. 죄책감도 느끼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는 병원을 원망하고 의사를 원망하고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할 겁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이 병원을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우리 다시 한 번 생각을 고쳐먹읍시다.
만약 우리가 한 사람을 선한 마음으로 무료 치료했다 칩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보답하는 마음으로 훗날 입원비를 가져오거나 그것도 아니면 환자 다섯 사람을 병원에 소개할 것입니다.”

원장의 말은 맞았다. 그의 병원은 원장의 가없는 베품으로 무료 환자가 많았으나 끝내 문 닫는 일없이 운영되었다.

무료입원환자들이 원장의 마음씀씀이에 감동한 나머지 훗날 밀린 입원비를 내는 경우가 많았고, 병원을 돕겠다는 독지가들의 손길도 이어진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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