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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호

그리스도인의 사명 外
  글··靈海 박재천 (목사. 시인. 가정·효 아카데미 대표)

돕는 자와 돕지 않는 자

아프리카 랑바레네에는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경영하는 병원이 있었다. 이 병원에서 보조 간호사로 궂은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안 프레밍거(Marian Preminger)이다.

그녀는 1913년 헝가리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돈이 많았고, 뛰어난 미모를 타고났으며 악기 연주도 곧 잘했다. 한 때 그녀는 비엔나에서 무대 배우로 있었는데 그때 의사와 결혼했고, 미국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영화감독 오토 프레밍거와 재혼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치와 방탕 때문에 이 두 번의 결혼을 모두 실패했다.
1948년 그녀가 파리에 살고 있을 때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잠깐 돌아와 어느 시골 교회에서 오르간 독주를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리하여 작은 시골 교회를 찾아가서 슈바이처의 오르간 연주를 들었다. 마리안은 이 연주를 들으면서 자신의 허망한 생활을 뉘우치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랑바레네 병원의 간호사로 자원하여 무식하고 가난한 흑인 병자들을 위하여 일하게 되었다. 빨래나 부엌일은 손도 대지 않던 귀족의 딸이 늙어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20여 년 동안 이 병원에서 일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나를 파멸에서 건져 주셨으니 나도 그 사랑의 복음을 환자에게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단순한 믿음, 선교 정신으로 평생을 바쳤던 것이다.

은퇴한 마리안 프레밍거는 뉴욕에서 살다가 1979년에 사망하였는데 당시 <뉴욕타임스>는 이런 조사를 실었다고 한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이 세상 사람들을 둘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하나는 돕는 자요(helpers), 다른 한 종류는 돕지 않는 자(nonhelpers)라고 말이다. 마리안 프레밍거는 생애의 전반은 돕지 않는 자에게 속했다가 그 후반은 돕는 자에 속한 영광된 크리스천으로 개선하였다.”

선교사를 살린 귀한 보리죽

아프리카의 최 전초 선교기지에서 봉사하고 있는 한 여자 선교사가 위독한 병에 걸렸다. 게다가 한 달 동안 생활비도 도착하지 않아 매일 보리죽과 깡통에 든 분유만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소홀히 하지 않으시나 하며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30일 정도 지나자 심했던 질병이 사라져 건강이 회복됐고 생활비도 다시 도착하여 식량을 구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여러 해후 안식년으로 귀국한 이 선교사는 교회에서 당시 힘들었던 경험을 간증했다. 예배가 끝나자 친절해 보이는 한 의사가 찾아와 그 질병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더니 “선교사님의 생활비가 제때 왔더라면 선교사님은 오늘 살아서 저와 대화를 하지 못했을 뻔했습니다. 잘 모르셨겠지만 사실 그런 소화 장애 질병은 30일간 보리죽 처방을 해야 낫는 병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그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자기를 돌봐주셨는지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적절하게 돌봐주시는 분이다.

역경을 이겨낸 윌리엄 캐리의 기도

나중에 버마(미얀마)로 가서 헌신적인 선교사로 일한 미국의 아도니람 저드슨이 인도에서 일하고 있던 영국의 위대한 선교사 윌리엄 캐리를 1812년에 방문하였다. 저드슨은 캐리 선교사와 정원을 함께 거닐면서 캐리 선교사의 헌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했다.

캐리 선교사는 세 차례에 걸쳐 살해당할 뻔했고, 인도 정부의 갖은 선교 방해를 받았으며, 수고와 땀으로 이룩해 놓은 원고와 인쇄 도구들과 서류들이 거의 다 불타 버리는 화재를 경험했었다.

저드슨은 어떻게 이러한 수많은 역경들을 견디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 그 용기와 믿음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그러자 캐리 선교사는 저드슨을 안내하여 정원의 한편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말했다.

“여기가 바로 나의 예배 장소이자 기도와 묵상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해서 닥쳐온 고난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매일 새벽 5시마다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저 꽃들을 바라보며 묵상을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6시 경에 들어가서 아침을 먹고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저녁이 되면 밥을 먹고 나서 손에 성경을 들고 다시 이 자리로 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

1939년 뉴욕항을 떠나 독일로 가는 배에 한 청년이 승선하였다. 그가 아직 젊은 나이에 독일로 향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독일은 히틀러 정권에 의해 세계대전에 광분해 있었으며 유태인 대학살과 같은 인류 역사상 가끔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독일의 교회는 이런 비인간적인 만행를 바라보면서도 침묵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히틀러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 교회의 잠을 깨우고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고자 그는 유유히 조국 독일로 향했던 것이다.

그 날 그의 일기장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나의 장래에 대하여 그동안 파도처럼 일던, 몹시도 불안해하던 마음이 이제 잔잔해졌다. 이는 내가 갈 길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로 돌아간 그는 나치의 학정에 침묵만 지키고 있던 교회를 일깨우고 히틀러의 죄상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바르멘 선언’을 했다. 그 결과 그는 결국 투옥되고 말았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재질을 알고 있던 미국의 교회는 그를 구출하려고 백방으로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본회퍼는 유니온 신학교 교장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띄웠다.

“나는 내가 독일에 돌아온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힘차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결국 39세의 젊은 나이에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본회퍼는 행복한 인간이었고, 성공한 목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걸어갈 방향과 목표와 할 일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긍지를 가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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