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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호

낙태는 지우개가 아닙니다
  글·홍순규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제1회 생명윤리운동 수기 공모대회 우수상)



어린 시절 조립식 레고를 하나하나 짜 맞추던 그 때, 혼자 끙끙대면서도 무언가 하나가 완성되면 그것이 얼마나 나에게 소중하던지, 내 나름대로의 이름을 지어주고, 그것을 높이 치켜들며 자랑하던 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순간만큼은 나에게 있어 그 어떤 것도 그보다 더 큰 기쁨을 줄 수 없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시고,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시던 그 때, 누군가를 향한 하나님의 설레는 꿈으로 계획되고, 그 하나의 형상을 어미의 뱃속에서 하나하나 빚으시고, 맞추어 가실 때의 그 마음이 얼마나 행복하고, 흥분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내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존재일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이 흥분되고 설레는 하나님의 창조의 시간, 모든 시간이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해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만 같은 그 생명의 거룩한 시작이, 요즘 사람들의 눈엔 그저 성적 유희의 부정적 결과나 실수정도로만 비춰지는 듯 해 가슴이 아프고, 때로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곤 합니다.

2003년 겨울, 눈물로 얻었던 한 아이를, 가장 사랑했던 나의 제자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는 무너진 가정 속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살던, 그래서 자신의 가치는 오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때 지켜진다고 믿으면서 자신을 함부로 세상에 던지며 거칠게 인생을 살았던 한 여자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 그 분만이 그 아이를 고칠 수 있고, 만져줄 수 있고, 인생의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줄 수 있다는 오직 그 하나의 믿음이 나로 하여금 그 아이 앞에 무릎 꿇게 했습니다.

수련회의 열기가 점점 달아오르고 있던 그 시간, 홀로 떨어져서 고개를 젓고 있던 그 아이를 작은 기도실로 불러 복음을 전했고, “예수님을 믿으면 지금 제가 누리고 있던 이 삶에서 돌아서야 하잖아요. 전 지금이 좋아요.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다구요!” 외치는 그 아이 앞에 무릎으로 애원하며 주님을 전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를 당신의 가슴에 품어주셨습니다. 그 이후, 아이의 모든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말씀이 그 아이의 가장 사랑스런 친구가 되었고, 기도의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원망하던 가정 속에 들어가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함께 했던 친구들로부터 폭력과 갖가지 모욕 속에서도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며 눈물로 그들 앞에 서는 작은 거인이 되었습니다.

그랬는데… 정말 상상할 수조차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아이를 이끌고 있다고 믿었고, 모두가 기적이라고 그 아이를 행복에 겨워 바라보고 있었는데, 2003년 겨울, 그 아이는 다시금 예전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다름 아닌 친구의 낙태가 그 원인이었습니다.

‘고2 여학생, 한 남자친구와의 두 번째 임신, 그리고 두 번째 낙태의 결정.’ 이것이 그 아이의 친구였습니다. 아직 학생이었고, 부모에게는 비밀이었기에 낙태에 사용되는 비용조차 구할 수 없어서 친구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워야만 하는 친구를 위해 돈을 모아주는 것은 곧 우정의 깊이를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였습니다.

하루는 그 친구를 위해 저에게 이 아이가 찾아 왔습니다. “전도사님, 돈이 필요해요. 우리 학생회에서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하고 겸연쩍게 부탁을 합니다. 난 ‘무슨 중요한 일을 계획하고 있구나!’하는 마음에 환히 웃으면서 대답을 했습니다. “무슨 일인데? 좋은 일이면 얼마든지 나도, 우리 학생회도 도와줄 수 있지!”하고 대답하자, 조심스레 친구가 낙태를 해야 하는데 돈이 좀 부족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놀란 마음에 멍하니 서 있다가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과 생명의 소중함, 그 친구를 돕는 가장 최선의 길은 습관적으로 성적인 유희를 즐기다가 실수로 생긴 아이를 낙태시키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고,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일을 돕겠다고 덧붙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전 그 아이의 대답을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 뱃속의 아이만 생각하시고, 내 친구의 인생은 모른 척 하세요?”

뱃속에 있는 생명을 살리자는 것이 그 아이에겐, 아니 최소한 그 주변의 아이들 모두에겐 그 친구의 인생을 망치는 잘못된 결정으로 받아들여졌나 봅니다. 그 이후 이 아이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노래방 도우미 등과 같은 아르바이트를 친구들과 함께 하며 그 돈을 마련해 주었고, 그들의 그릇된 우정을 지켜냈습니다. 

내 머릿속엔 온통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고, 여러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무엇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어 가는가? 아니, 무엇이 이 사회를 이토록 잔인하게 만들어 가는가? 한 생명이 이렇게 깨끗이 지워져가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세대의 사람들을 보며 과연 언제까지 침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얼마나 더 많은 생명들이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실수였다는 이유로, 생활이 어렵다는 이유로, 인생의 짐만 될 뿐이라는 이유로, 잘못 쓰여진 글씨처럼 지워져 가야 하는 것인가?
낙태의 쉬운 표현이 ‘지운다’는 말입니다. 낙태는 왠지 껄끄럽고, 혐오스런 표현이기에 간단하게 ‘지운다’는 쉬운 표현으로 요즘 사람들 사이에 흔히 사용됩니다. 가수 전영록이 목청껏 불렀던 ‘사랑을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한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생명도 원치 않으면 깨끗이 지워야 하고, 지울 수 있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이 이제 사람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생명은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연필로 쓰여진 몇 개의 잘못된 글자일 수 없습니다. 생명은 가치입니다. 생명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입니다. 생명의 소유권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지 않습니다. 생명을 주시고, 거두시는 것은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이며, 권리입니다. 더욱이 생명은 실수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입니다.

얼마 전 내가 섬기는 교회에 한 미혼모 보호시설의 간사님들을 초청해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을 부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가져온 사진들이 교회의 입구에 진열되었고, 이를 지켜보던 학생들도, 교회의 성도들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살인의 장면들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압니다. 그 현장에,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 어른들의 삶속에 이 같은 살인들이 이미 저질러졌고, 지금도 저질러지고 있음을 압니다.

여러 사진들 가운데 한 사진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낙태가 이루어지는 모습은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접해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자궁 속에서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의사들의 손에 들려진 도구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져서 죽어버린 조각들로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모습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잔인하고, 추악한, ‘이것이 정말 어미로서 할 수 있는 결정인가?’라고 생각될 만큼의 악한 낙태의 방법을 보았습니다. 주사약을 주입해서 살아있는 아이가 어미의 뱃속에서 서서히 자라면서 몸이 썩어 죽어가도록 만드는 낙태의 방법. 아이의 유일한 보금자리인 자궁이 무덤이 되고, 가장 포근하고 따뜻한 양수가 죽음의 이불이 되고, 어미로부터 공급받는 탯줄의 양식이 극약이 된다는 것을 이 아이는 알지 못한 채 이렇게 서서히 죽어가도록 만드는 것이 과연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결정 가운데 들어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과연 이 영혼에 새겨지는 죽음의 고통과 상처, 어미의 뱃속에서 자라면서 희망과 소망이 아닌 두려움과 어두움으로 새겨지는 영혼의 아픔을 어찌해야 하나요? 누가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나요?’하는 생각들을 하노라면 답답해지기만 합니다.

‘생명(生命)’, 이것은 ‘살아있는 목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깊은 뜻을 살펴볼 때 ‘생(生)’은 ‘태어나다’는 의미를 지니고, ‘명(命)’은 ‘목숨’뿐만 아니라 ‘명령’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명(命)’이라는 한 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신이나 높은 사람으로부터 부여받은 명령을 목숨 걸고 지킨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결국 생명은 단지 살아있는 목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독특한 사명과 의미가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손에 의해 하나님의 거룩한 존재로서의 생명이 함부로 버려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러하기에 일단 창조된 생명은 우리의 결정이 아닌 하나님의 결정에 맡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대 가운데 필요한 것은 침묵이 아닌 듯합니다. 올곧은 소리입니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듯, 지금 우리가 선 이 땅에 생명을 위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자리를 회복하기 위한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필요한 때라는 강한 확신이 내 안에서 들려집니다. “내가 안 해도 누군가 하겠지!”하는 영적 나태함에서 벗어나 “나라도 해야지”하는 분명한 책임 의식과 열정이 필요한 때가 바로 오늘인 것을 느낍니다.

지금 이 땅은 생명에 관한 한 깊은 어둠 속에 점점 갇혀져 갑니다. 그러나 어두움의 깊이가 크면 클수록 작은 불빛은 더욱 강렬한 희망이 됩니다. 마치 가장 어두운 하늘이 수많은 숨은 별들의 축제가 되듯이.

생명의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만이 이 땅의 유일한 소망이 아닐까요? 성적 유희의 작은 실수로 치부되어, 무가치와 무의미로 버려지고 있는 수많은 영혼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렸다면, 이제 생명을 위한 치열한 전선의 최전방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생명의 소중함과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그저 자신들의 행복만을 위해 한 생명을 희생시켜도 괜찮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올바른 방향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한 생명 한 생명을 위해 외쳐야 하고, 깨닫게 해야 하고, 느끼게 해 주어야 합니다. 비록 그 길이 외로운 길이라 해도 생명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우리의 가슴에 새기고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조차, 아무런 소리가 되지 못하는 내 모습에 또한 씁쓸한 가슴을 쓸어내릴 뿐입니다. 

어미의 뱃속에서 채 피지 못한 한 송이 꽃처럼 소리 없이 죽어가는 그 영혼들의 가녀린 숨소리를 듣고 계신 하나님의 눈물이 내 눈에 새겨집니다. 지극히 작은 몸뚱이로 이 짧은 생의 한 맺힌 눈물과 설움 가득한 영혼의 한탄 소리가 이제는 나의 귀에도 들리는 듯합니다. 이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설레는 소망과 꿈을 지닌 그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이제는 나를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이 이 작은 가슴에 메아리쳐 울립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 자료출처: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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