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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4월호

거룩한 두려움-열 개의 절망과 두 개의 희망 -
  글·최원현 (작가, 한국문협, 국제펜클럽 회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강남문협 수필 분과회장, 허균문학상, 서울문예상을 수상했으며,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아침 무지개가 말을 할 때>, 시집 <아름다울 수> 등이 있으며, 청운교회 안수집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엔 참으로 많은 눈이 내렸다. 그러나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린 속에서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보여지던 망연자실한 모습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눈이 내린 때문에 수 년 동안 공들여 가꿔온 작물들을 다 망쳐 버렸고, 키우던 가축이며, 비닐하우스까지 순식간에 다 잃게 된 그들의 손해와 소식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하물며 직접 당한 당사자들이야 오죽 하랴.

그런데 그런 안타까운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렇게 하얗게 변해버린 세상을 보면서,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단순한 기상현상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아주 편할 일이다. 헌데 그렇게 눈 덮인 거리며 지붕 위며 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참 많이도 참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 싫은 것, 보고 싶지 않은 것,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요즈음, 그렇다고 그 보기 싫은 것들을 다 쓸어버릴 수도 없이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실까,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마치 어린아이 같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잠시나마 덮어버릴 수 있는 방법으로 이렇게 눈을 내리시곤 그 하얀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들이 당신의 뜻과 마음을 읽고 헤아리기를 바라신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정작 하얗게 변해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음에 어떤 변화가 왔을까? 그리고 그 하얀 눈 위에 서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 시대를 두고 희망이 없다고들 말한다.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양보와 용서와 희생 같은 단어들은 사전 속에서 잠자는 단어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세상이 삭막해졌고, 각박해 졌고, 사람들은 오직 자기만 잘 살고 잘 먹고 잘 쓰겠다고 한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진정 이 땅에서 사랑과 정의는 아주 멀어져 간 것일까?

문득 구약성경에서 요단강을 앞에 두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정탐을 떠났다 돌아오는 열두 지파 대표들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 중 열 명의 눈에는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의 빛이 가득하였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는 두 사람의 눈에는 자신감과 새 땅에 대한 희망과 약속된 선물을 받는다는 희망과 기쁨이 넘쳤다. 같은 상황을 보고 왔건만 그들이 본 열 개의 절망과 두 개의 희망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보이는 것만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것의 차이, 현실과 숨겨져 있는 미래의 것까지 보는 눈은 인간의 한계 너머에 있는 절대적 힘에의 의탁과 믿음이 아닐까. 그러나 두려워해야 할 것들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사람들, 오늘의 정치현실은 말할 것 없고, 종교계 특히 하나님을 믿는 기독인 마저 아무런 두려움도 갖지 않은 채 자기만을 챙기고,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은 아예 생각지도 않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참 많은 착각을 하고 산다. 문명이란 이름으로 이루어낸 것들을 보며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대한 분은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되지 않던가. 실패한 사람에게는 실패의 이유가 대단하지만 성공한 사람에겐 성공의 이유가 아주 간단하다고 한 말처럼, 보는 관점, 의지하는 대상이 다를 때 결과는 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되는 것 아닐까.

우리 삶 속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기적들을 보며 느끼며 살아가는 동안 자연스레 감사가 우러나올 때 보다 인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결국 이 시대의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착각은 거룩한 두려움의 실체를 잊고 있다는 것이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만큼 두려워해야 할 것도 두려워 할 줄 모른다는 말이다.

한 영국 수상의 묘비명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새겨져 있다 한다. 두려워할 참 대상을 알게 되는 순간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지를 알게 되고, 그 외에는 결코 두려워 할 것이 없음을 분명하게 알았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기에 부끄러운 짓을 하고서도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삼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두려움의 실체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됨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어떠한 선택도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실도 거짓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엄연히 다른 것임에도 세상이 변하니 하나님의 법도 따라 변해야 한다며 인간의 법과 질서 속에 하나님의 법을 담으려고까지 하고 있다. 그러면서 법을 만드는 곳에도, 법을 지키는 곳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많이 있는데도 법의 제정이나 집행이나 준수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당하고 말았지만 오늘 이 시대에는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이 어디든 가는 곳마다 그보다 몇 배씩 더 많이 있는데도 오히려 더 불안하기만 하니 모를 일이다. 하늘의 분노를 늦추거나 되돌리기는커녕 가난한 우리 이웃, 힘없는 이웃들의 절망과 아픔에조차 눈길도 제대로 못 주고 있는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이면서도 되려 우리가 만든 법을 마치 하나님의 법인 양 하나님의 뜻까지 갖다 맞추려하는 불손한 착각 때문은 아닐까?

교회당이 커져가고, 그 많은 자리도 채워지지만 한 발자국 교회당 밖의 현실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또 하나의 집단만 더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 구약시대 아이성의 실패나 신약시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같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죄를 저지르고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오히려 너무나 많아, 만일 그렇게 하면 이 땅에 남겨 둘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참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온 세계는 게놈 신드롬에 빠져있다. 물론 과학이 인류문명에 많은 공헌을 해 왔고, 또 삶의 질을 높여준 것이 사실이다. 허나 게놈지도 완성이 인간의 불치병을 정복하는 기대에 희망을 주고 있지만 자칫 금단의 실과처럼 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결과요, 하나님이 금하신 부분이라는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코 신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인간복제와 같은 위험천만한 일까지 맡기실 만큼 바쁘고 책임 없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과학은 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신의 영역으로 남겨놓을 줄 알 때 진정한 인간의 우수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거룩한 두려움을 갖는 일이다. 두려워 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는 두려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바로 살아갈 수 있는 참 지혜가 아닐까 싶다. 열 개의 절망과 두 개의 희망 사이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택할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두려움이다. 험악하고 무지막지한 이 시대를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참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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