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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4월호

자식이 뭔지
  글·김종철 (충남의대/충남대학교병원 진단방사선과 주임교수/과장, 영상 의학회 회장, 신실회(신앙을 실천하는 모임) 대표, 가족 치유 상담 센터 강사 및 지도위원이며, 늘사랑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의학 전문 서적 외에 <성스러운 성에 성공하자> <팔푼이 행진곡>)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은 자식 농사(?)에 성공적이건 아니건 간에 지구촌에 있는 모든 부모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유아 교육, 교육학, 상담학, 가정 사역학, 목회학, 심리학 교수 및 박사라 하더라도 자기 자녀 키우는 데 고충을 겪고 애를 먹지 않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자녀는 다른 애들과 달라서 자기가 모든 것을 척척 알아서 잘 해요. 스스로 잘 자라났을 뿐이지 부모인 우리가 가 해 준 게 별로 없어요. 키우기가 너무 수월했어요.” 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긴 하지만, 찬찬히 따지고 보면 그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도 힘들고 괴로운 때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자식 키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이 세상에 없다.” 라는 말은 자식을 둔 부모 누구에게나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산모가 아기의 출생을 맞게 되면 우선 신생아의 사지가 멀쩡한 지부터 물어보는 게 상례이다. 이렇게 기형이 아닌 정상아(正常兒)이기만을 바라던 부모라도, 생후 1년간 급속하게 성장 발달하는 아이를 보면 자기 아이만이 너무 잘 생기고 영특한 아이인 것으로 착각하여 환희에 젖어 살게 된다.

이미 몇 번째 아이를 키워본 부모라도 별로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기를 데리고 수퍼마켓이라도 나가보면, 처음 보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아이를 쳐다보고 “까꿍!”하는 것을 보고, 분명 자기 아이는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위인이 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할 지도 모른다. 생후 2년째 접어들어 아이가 매일 새로운 것을 배워 모방하는 것을 보고, 자기 아이의 지적 발달 속도가 대단한 것 같아 영재 교육을 시킬 욕심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세 살이 되면서부터 “아니야!”, “싫어!”, “내 맘대로 할거야!” 라는 말을 하면서 옹고집을 부리는 것을 보고, “천재 아이”에 대한 환상이 서서히 깨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더더구나 자기 아이가 다니는 유아원이나 유치원에 학부형으로 가볼라치면, 자기 아이보다 훨씬 잘 생기거나 예쁘고 똑똑한 아이가 많은 것을 보고 큰 실망을 안고 돌아오게 될 지도 모른다.

이런 부모와 달리 어떤 부모들은 자기 아이의 성장 발육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너무 느려서 혹시 자기 아이가 정신 장애자나 신체적 지체아가 아닌가 하고 큰 걱정에 빠지기도 한다. 자기 눈에는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예쁘기만 한 자기 자녀인데도, 아이를 데리고 외출해보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다른 아이에게로만 향하고 자기 아이에게는 잠깐만 머물거나 아니면 아예 외면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큰 상처를 받게 될 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가 키우는 어린이들은 정작 3~4세가 되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아름다운 외모가 중요하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고, 또 5~6세가 되면 자신과 영리한 친구들 사이에 너무 큰 격차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유치원이나 초등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벌써 비교와 경쟁으로 인해, 아이와 부모 모두, 자존감에 심한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영특하고 핸섬하거나 예쁜 자녀를 둔 부모는 부모대로 상위 랭킹을 유지하려고 기를 쓰게 되고, 못 생기고 열등한 지진아나 장애아를 둔 부모는 자식의 현실이 부모의 잘못에 기인한 것처럼 죄책감에 빠지면서 아이의 장래에 대한 심한 불안감에 어쩔 줄을 모르게 될 것이다.

자녀가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 집을 떠나는 고등학교나 대학교 시절부터 실질적(경제적, 심리적, 정서적, 사회적, 가정적)으로 자녀를 “떠나보내는” 선진 외국과는 달리, 한국인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이 대학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직하여 결혼할 때까지 책임질 뿐만 아니라, 그 자식이 낳은 손자 손녀까지 염려해야 할 ‘숙명’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외국 대학에 유학중인 한국인 자녀들까지도, 당연히 한국에 계신 자기 부모가 학비, 생활비, 용돈까지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여, 매달 그 부모에게 당당하게 송금을 요청하지 않는가? 이런 자녀일수록 “물론 우리 사회에서는 어른이 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아 있을 수 있다(실상 우리는 어린아이로 남아 있으라는 권고를 매일 듣고 있다).” 라는 마이클 노박의 말을 근거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할 지도 모른다. 정작 같은 대학에 다니는 본국 학생들은 수업이 없는 시간이나 방학 혹은 공휴일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기 학비를 스스로 벌어 가는데도 말이다.

그네들의 자주적인 생활 태도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공부한다는 핑계로 계속 고국의 부모에게 모든 짐을 떠맡기는 우리 자녀들을 보면, 그들의 장래가 심히 걱정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부부 생활을 다 팽개치고 자식 뒷바라지만 하는 것이 희생적인 부모의 진정한 모델인양 착각하여 다 큰 자녀를 갓난 아이 대하듯 하고 있는 한국인 부모들을 보면, 이래서 우리 나라가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모자라, 외국에서 공부하는 대학생 혹은 대학원 자녀에게 따뜻한 밥이라도 직접 해서 먹여야 한다고, 남편을 한국에 홀로 남겨 두고 자식이 있는 곳으로 멀리 떠나버리는 어머니까지 부지기수이다. 이렇게 자녀 교육을 위해 정상적인 결혼 생활까지 포기하는 부모들이 많은 나라에서 왜 노벨상 수상자가 많지 않은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교육열로 따지면 유대인을 능가하면 했지 절대로 뒤지지 않을 대한민국인데도 불구하고, 그 많은 노벨상은 왜 유독 대한민국을 피해서만 다니는지, 우리 모두 그 이유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자식을 남편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자식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오마니’들은 모두 ‘Oh, money!’로 전락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외국에 함께 떠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독수공방하며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한국인 아빠들에게는 말이다. 한국 중년 남성에게 있어서 40대(‘deadline decade’)의 사망률(death rate)이 전세계적으로 유난히 높은 이유가 나변(那邊)에 있을까? 직장에서 퇴근하여 돌아와 봐야 반길 가족 하나 없이 썰렁하고 텅 빈 집인데, 그 집에 매일 잘 들어올 ‘대단한 남편’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렇찮아도 젊음의 상실과 죽음에 대한 불안 및 고독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는 중년인데, 자기 주위에서 잔소리 하나 없이 그냥 말벗이 되어 주곤 하는 다른 여인과 우정이 싹트지 않겠는가? 정서적인 만족감, 안정감으로 출발한 이성과의 친밀감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외도나 불륜으로 빠져, 외국에 있는 본 부인이 만사를 팽개치고 귀국하여 여인들끼리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일이 적지 않은 게 우리네 현실 아닌가?

“온 세상이 자식을 버려도, 어머니는 자식에게 온 세상이 된다.”라는 어빙의 말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과 용납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필자를 포함한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 관한 ‘과보호’와 ‘방임, 방치 내지는 유기’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는 자녀를 통해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성취하려는 대리 만족을 꿈꾸거나 노후에 애써 키운 자식 덕이나 보려고 하면서,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자녀들을 자기 방식대로 조종하려는 횡포와 폭력을 일삼는 부모들이 많지 않은가? 상당수의 부모들은 자기 자녀의 말이나 사고 혹은 행동 거지 하나 하나에 희비가 교차되면서, 그 자녀에 대한 책임 의식 때문에 심한 죄책감에 몸부림치기도 할 것이다.
 
늘 위해서 기도하는 자기 자녀가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면 부모인 자기 때문이라고 심한 자책감에 빠지고, 자녀가 제대로 신앙인이 되기만 하면 부모인 자기가 신앙적 모범을 보이며 제대로 양육한 결과라고 생각하여 자만에 빠지는 크리스천도 적지 않다.

자식에 대한 극심한 염려와 간섭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녀가 원하는 대로 자라주지 않으면, “그렇게 널 사랑하고 희생하는 네 부모의 말을 왜 그렇게 듣지 않니? 네 부모는 너에 대해 두 손과 두 발 모두 다 들었으니, 이제 집을 나가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 라고 자식에 대한 포기 선언까지 해 버리는 부모들도 적지 않아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 대대로 물려온 “자식이 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먼저 자기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라고 해서 좌지우지하거나 사유물처럼 마음대로 다룰 자격이나 권리가 있는 부모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엄청난 자유 의지를 주셔서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이다.

자식은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기업, 상급, 선물이기 때문에, 그를 환대해야 할 의무가 우리 부모에게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를 찾아온 객(guest)을 약속의 후손으로 잘 받아들인 후에, 하나님의 교양(training,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사역을 의미)과 훈계(instruction or admonition, 사랑의 질책과 과오 지적 및 인격적인 인정)로 양육할 충직한 청지기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부모의 공로로 자녀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온전히 무조건적이고 비가역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기 자녀가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아직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가 쓸데없이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 자녀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면, 부모 자식 모두 “왕 같은 제사장, 택하신 족속,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함께 섬기게 될 뿐이다. “하나님은 가정 생활의 본질 속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를 형성하신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녀가 어떻게 변하는가가 아니라 부모가 어떻게 변하는 가이다.” 라는 폴 스티븐스(R. Paul Stevens)의 말대로, 자식에 앞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먼저 변해 가는 부모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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