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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호

삶의 흔적에 대한 소고(小考)
  글·김종철 (충남의대/충남대학교병원 진단방사선과 주임교수/과장, 뉴셀프상담연구원, 신실회 대표, 가족치유상담센터 강사 및 지도위원 )
뭔가에 떠밀리듯 살아온 우리들이라도 12월 달력을 쳐다보노라면 마음이 착잡해질 것이다. 지나온 과거 여정에 찍힌 각자의 발자국들이 기나긴 기억 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갈지 모른다. 그러잖아도 연말만 되면 그 때까지 달려온 자신들의 삶을 곰곰이 되살펴 보게 되지 않던가?
 
이른 아침에 인적이 드문 겨울 해변을 거닐다가, 모래사장에 긴 줄로 남겨놓고 날아가 버린 새들의 족적(足跡, footmark, footprint)을 뒤돌아보듯이 말이다. 과연 내 인생의 발자취는 어떤 색깔이나 형상 혹은 냄새를 풍기고 있을까? 밀물이 들어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일시적인 모래 발자국이나 모래성인가, 아니면 밀물이 썰물로 바뀌어도 뚜렷하게 각인된 ‘마크(mark)’인가?

삶의 여정에 남긴 각자의 ‘마크(mark: 표, 자국, 흔적, 각인, 표적)’에는 조금 전에 언급한 발자국(footmark) 외에도 지문(finger mark, fingerprint), 성과, 업적, 작품, 끼친 영향 등 여러 가지 형태와 종류가 있을 것이다. ‘아무개’ 그러면 곧 그 사람을 상징하는 표지나 표식이 떠오르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논외(論外)로 하자.

왜냐하면, 좋은 인상을 풍기지 못하고 나쁜 인상만 주는 표(標, mark)를 가질 바에는, 차라리 표(表) 나지 않게 조용히 사는 게 더 나은 인생이 아닌가 하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동짓달을 맞아 지나온 삶의 흔적을 살펴보노라니, 문득 인류 최초에 표를 받은 사람, 즉 동생 아벨(Abel)을 죽인 가인(Cain)이 연상된다.

구약 성경 창세기 4장 8-16절에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그것도 형제 사이에서)으로 인해 가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징벌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표준 새 번역 성경 참조).
8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9 주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11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13 가인이 주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14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15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가인에게 표(標)를 찍어 주셔서(The lord put a mark on Cain ; The lord set a mark upon Cain ; The LORD appointed a sign for Cain),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16 가인은 주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mark or sign)가 가인의 이마에 있었는지 아니면 얼굴의 다른 부위나 신체의 노출 부위 어딘가에 있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또 그 모양이 어떤 것이었는지(포청천의 이마에 있는 휘어진 칼날이나 낚시 바늘 모양의 표지가 가인의 표를 흉내낸 것인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누가 가인을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표를 주신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2001년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우리의 이마, 얼굴 혹은 몸에는 어떤 표가 만들어져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눈에 비친 우리의 현재 모습은 어떨까? 주위에서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나에 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첫 대면하여 대화를 나눌 경우, 나에게 어떤 인상을 받으며 또 나를 어떤 사람으로 평가할까?
 
내가 나를 생각할 때 딱 떠오르는 캐릭터나 표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비정상적이고 괴이한 일이나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찾아다님(hunting bizarrerie ; seeking the strange and different ; curiosity-seeking)’이라는 본래의 의미가 많이 변질된 ‘엽기(獵奇)’라는 말이 붙은 ‘엽기 토끼’나 ‘엽기 캐릭터’의 모습만 연상되는가?

이것과는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을 쳐다보거나 생각할 때 그/그녀를 대표할 만한 어떤 표를 머리에 떠올리는가? 혹시는 내가 하나님이라도 되는 듯 그 사람에게 내 마음대로 어떤 표를 부여하지는 않았는가? 내가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 다른 사람을 내 멋대로 판단하고 비난하면서 그 사람에게 걸맞지 않은 표를 하사(下賜)하지는 않았는가?

한 해를 살아오는 동안 내가 남의 이마나 얼굴에 그 사람의 허락도 없이 막 찍어 댄 ‘불도장’은 과연 얼마나 많을까? 본래 ‘화인(火印)’이나 ‘낙인(烙印, brand or stigma)’이란 쇠붙이로 만들어 불에 달구어 찍는 도장으로, 목재나 가구, 기구, 가축 따위에 주로 찍지 않았던가?

하기야 예전에는 형벌로 죄인의 몸에 낙인을 찍는 일도 있었긴 하지만 말이다. 말 못하는 짐승이나 가축에게 ‘자기 것’이라는 소유나 소속의 표지로 찍는 화인이나 낙인도 고통스럽기 그지없을 텐데,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과 인격을 가진 인간들을 향해 찍어누른 ‘불도장’은 얼마나 끔찍하였을까?

그 대상이 다시 보지 않고 살아도 될 남이었던, 아니면 한 지붕 밑에 살면서 가장 사랑해야 했을 가족이었던 간에 말이다. ‘저런 불에 태워 죽일 놈이 있나!’라고 하면서 정치가나 특정인을 막 욕해도 그 사람이 알면 생사람 잡는다고 화를 낼 만한 일이겠지만, 늘 얼굴을 맞대며 사는 가족이 그 화풀이 대상일 경우에는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남으로부터 저주스러운 낙인이 찍히는 것에 초연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 왜 우리는 남에게 증오나 비난의 낙인을 그리도 쉽게 찍곤 하는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불도장을 찍히거나 불화살(fiery dart or incendiary arrow)을 맞아 심신과 영혼의 화상으로 몇 날 혹은 몇 달을 끙끙 앓아 본 쓰라린 경험이 있으면서도, 자기가 찍어 박은 화인이나 겨누어 쏜 화전(火箭)으로 남의 생살이 찢기고 타는 고통은 왜 그리도 잘 외면하는 우리들인지? 그러기에 우리가 받은 아픔이나 상처보다도 우리가 남에게 준 낙인의 고통과 후유증을 더 깊이 또 심각하게 생각해 볼 올해 연말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정하여 마구 무시하면서 형편없이 나쁜 사람이라고 부정적인 말을 자주 해대면, 정작 그런 대접을 받는 당사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지로 부정적이고 나쁜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경우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심리적 효과를 “낙인 효과” 혹은 “스티그마 효과(stigma effect)”라고 하지 않던가?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며 무엇을 기대하는가에 따라,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자기에 대한 정성, 관심, 취급, 기대 수준에 따라, 그 사람의 언행이 그대로 변해 가는 경우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치나 소원이 긍정적, 생산적, 희망적, 낙관적일 경우보다는 부정적, 파괴적, 절망적, 비관적일 경우가 많은 게 우리들의 비참하고 가련한 실상 아니던가? 인간의 뇌는 한 가지 부정적인 말을 중화하는데 40개의 긍정적인 말을 필요로 하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상처를 주기는 쉬우나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비용 부담이 커진다는 말일 게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주의 낙인을 쓰라린 마음으로 품고 사는 ‘가인의 후예’들인 우리들에게 사탄이 주는 부정적인 자아 개념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은혜를 베풀고 계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시몬’을 ‘베드로’로, ‘사울’을 ‘바울’로 개명(改名)하신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의 삶을 180도로 전환시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사회에서도 사랑이란 상대방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의욕을 꺾어놓고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과 자기 긍정, 의욕을 심어 주는 것 아니겠는가? 사랑의 언어가 있어야 상처 입은 마음이 치료되지 않겠는가? 사랑의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이라면, 동시대에 우리와 더불어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격려와 위로의 말을 하는 훈련을 철저히 해야 하지 않을까?

몸에 밴 “낙인 효과”를 반성하면서 이런 나쁜 습성을 우리들의 언어 생활 속에서 하나 둘씩 몰아 내고, 이와 정반대 되는 긍정적ㆍ적극적 “피그말리온(Pygmalion) 효과”를 점진적으로 실현하도록 다짐해야 할 것이다.

“피그말리온(Pygmalion) 효과”라는 용어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이 용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이미 알고 계시는 분도 많을 것 같지만) 다시 소개해 볼까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여성들을 혐오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이다. 여성 혐오증 환자인 피그말리온이 어느 날 상아로 여인상 하나를 조각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볼품 없던 상아 덩어리를 끌과 정으로 쪼아대면서 매일 매일 조금씩 조각을 해나가는 도중에 전혀 예기치 않던 일, 즉 적잖게 황당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조각가의 예술적 열정과 재능으로 다듬어지면서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던 이 상아 여인상 작품에 예술가 자신이 매료되어 버린 것이다.
 
마침내 그는 자기가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조각품에 반하여 상아 덩어리에 불과한 그 여인 조각상에게 선물을 주면서 안아보기도 하고, 또 그 작품에 갖가지 장식을 하기도 한다. 피그말리온에게는 그 상아 여인이 너무나 고결하고 아름답게 보여, 그는 마침내 아프로디테(Aphrodite) 제전(祭典)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올리게 된다.

“신이시여, 저에게 저 상아 여인과 같이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라고 말이다.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누워있는 상아 조각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상아 여인의 몸에서 생기가 돌면서 마침내 상아 여인은 피그말리온의 아내로 살아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자기가 제작한 조각 작품에 반하여 그 조각품 여인을 열애한 조각가 피그말리온에 근거해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심리학적 용어가 생겼다. 이 “피그말리온 효과”란 누가 나를 존중해서 기대를 해 주면 그들이 바라고 격려하는 쪽으로 나 자신이 변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효과를 말한다. “피그말리온 효과”가 제대로 먹혀들려면 말 그대로 ‘피를 말리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필자는 ‘늘사랑 교회’에서 <늘감사 목장(牧場)>이라는 목장(구역 혹은 순)을 인도하는 목자로 봉사하고 있다. 금년 2월 말에 우리 가정을 포함한 세 가정으로 시작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은 아홉 가정으로 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부부를 제외하면, 모두가 신혼 부부 및 유아들을 자녀로 둔 젊은 부부들로 신앙 생활 햇수나 배경도 다양하였다. 지난 9개월을 되돌아보면, 신앙 생활을 막 시작한 초신자들을 비롯해서 자기 주장이 강한 신세대 부부들을 우리 부부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조금씩 마음이 열린 이 신참(?) 부부들이 지난 9월경에는 조금씩 우리 목장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몇몇 부부들은 목장을 이끄는 우리 부부가 50대를 향해 달려가는 늙은이(?)답지 않게 칭찬과 격려의 말과 행동을 많이 하는 게 참 좋았더라고 고백하여, 리더로서 마냥 설익고 서툴기만 한 우리 부부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었는지 모른다.

자기들이 볼 때에는 그저 그렇고 당연하기만 한 언행을 보고도, 우리 부부가 자기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대단하다! 장하다!’ 라고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을 얼마나 자주 하는지 그저 황홀하기만 하더라나? 그런 마음을 실토하는 그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예뻤는지 모른다.

그런 그들에게 ‘그렇게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 아는 것 자체가 우리 부부에게 큰 칭찬과 격려의 말이 된다’라고 했더니, 우리보고 ‘칭찬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라고 또 치켜세우지 않는가? 사실 우리 부부는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습성을 기르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해왔다. ‘칭찬’과 ‘격려’는 ‘영혼과 심신에 보급되는 산소‘와 같아서 너무 쉽게 또 빨리 용해되므로 수시로 공급되어야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Encourage’라는 영어 단어는 ‘en’과 ‘courage’가 결합된 말로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우다’라는 뜻으로 풀이되면서, 상호간에 ‘선 순’환(good cycle)’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이 좋은 경험을 많이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우리 부부라고 해서 이런 ‘선 순환’을 유달리 많이 겪거나 창출해 내는 것도 아니다. 각자 자기의 인생 항해를 잘 더듬어보면, 순풍(順風)보다는 역풍(逆風)에 시달린 적이 더 많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바다에 이르기 전의 개울이나 강물 인생에서도, 전혀 예기치 못하였던 방향에서 뜻밖의 자갈들이 우리 인생의 물결 속으로 던져지거나, 산에 있던 큰 바위가 균열을 일으켜 낙석으로 굴러 떨어진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 모두 “자갈이 많은 시냇물이 아름다운 노래를 한다.”는 스페인 속담을 기억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는 12월을 보내면서, 영향력 있었던 삶의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음 기회를 최대한 선용하면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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