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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호

종이꽃
  글·조임생 (방송대 국어국문과 졸업, <창조 문학> 시 당선, <아동문학연구> 동화 당선, 제15회 한국일보 여성 생활수기 당선, 한국 문인협회, 기독교 문인협회 회원, 시마을 시낭송 회원이며 시집으로 ‘아직도 나는 흔들린다’가 있으며, 신성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졸업식장은 초입부터 돗대기 시장처럼 붐볐습니다.
졸업생과 하객들 그리고 꽃장수들과 손님들이 뒤섞여 정신이 없습니다.
“아니, 장미 열송이가 그렇게 비싸요?”
그 아줌마는 은회색 밍크코트를 걸치고 있었습니다.봄이 코 앞에 와 있는데도 추위를 많이 타나 봅니다.
“아유, 사모님. 말도 마세요. 졸업 시즌이라 꽃값이 곱절은 뛰었답니다.”
주인아저씨가 손사래를 치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아줌마는 자신의 밍크코트를 의식했나 봅니다.
“얼른 싸 주세요.’
아줌마는 꽃다발을 받아들더니 두말없이 교문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다음엔 긴 머리를 흰 리본으로 단정히 묶은 언니가 카네이션과 안개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사 갔습니다.
함지박엔 꽃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곱고 향기로운 꽃들을 보며 나는 슬퍼졌습니다.
‘생화도 많이 남았는 데 나 같은 종이꽃을 누가 사 간담?’

장미와 카네이션 그리고 후리지아와 보랏빛 붓꽃이며 안개꽃이 함지박에 절반 이상이나 남아있습니다.
“꽃장수가 너무 많아서 탈이야!”
주인아저씨가 투덜거렸습니다.
“게다가 꽃값도 만만치 않으니… 이걸 언제 다 판담?”
행사가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늧게 온 사람들이 허둥지둥 교문으로 밀려들었습니다.
이번엔 잠바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입니다.
“꽃다발 하나, 빨리 좀 만들어 주시오! 하, 이거 차가 밀려놔서.”
“나두요, 빨리.”

꽃은 막판에 정신없이 팔렸습니다. 주인아저씨는 그만 신바람이 났습니다.
“자. 마지막 장미 한다발, 말만 잘 하면 거저요, 거저!”
저쪽에서 꽃을 살피던 단발머리 소녀가 재빨리 다가왔습니다.
“얼마예요?”
값을 물어 본 소녀는 지갑을 열어보곤 망설였습니다.
“아저씨, 조금만 더 깎아주셔요.”
“이건 밑지고 주는 거야.”

아저씨는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때 다른 아줌마가 오더니,
“그거 이리 주세요. 얼마죠?”하곤 냉큼 값을 치르더니 총총 식장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소녀는 힘없이 돌아서려다가 나를 발견했습니다.
‘제발 나를 사 가 주세요.’
나는 애원하는 눈길로 소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저씨, 저 조화는 얼마죠?”
“아, 그거라면 아주 싸게 줄게.”

그제야 소녀는 값을 치르고 나를 샀습니다.
‘이젠 정말 내 주인을 만나는구나.’
나는 가슴이 파도치듯 울렁거렸습니다. 졸업식 행사는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아,저기 언니가 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까치발로 넘겨 보던 소녀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펑!”
“퍼펑!!”

식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폭죽이 요란스레 터졌습니다.색종이 테잎이 공중에서 무지개를 그리며 흩뿌려졌습니다.
“ 언니! 졸업 축하해.”
“고맙다.왠 꽃다발을 다?”
언니는 눈물이 글썽해졌습니다.
“삼촌은… 바빠서 못 오신대.”
“그래, 그러실거야.”

소녀는 언니의 팔을 잡아끌었습니다.
“언니, 우리 자장면 먹자.”
“ 지장면?”
“내 저금통… 그거 쓸려고 일년동안이나 꾹 참았잖아.”
두 자매는 학교 뒤쪽의 허름한 중국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입 가장자리에 짜장을 묻힌채 두 소녀는 마주보고 웃었습니다.
“ 꽃다발 받아보긴 정말 처음이야!”
“조화라서 미안해. 언니.”
“아니야. 생화는 금새 시들어 버리잖아. 하지만 조화는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걸.

이 꽃 좀 봐. 꼭 생화 같잖아? 정말 잘 만들었네.”
이럴수가! 나는 감격했습니다. 나 같은 종이꽃을 보고 기뻐하다니요.
“꽃다발이 우리 방을 따뜻하게 만드네.”
자매는 작은 거울 옆에 내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두 자매만 사는 집,아니 작은 방 한간입니다.

가끔씩 삼촌이 와서 들여다보았지만 곧장 쓸쓸히 돌아가곤 했습니다.삼촌은 한쪽 다리를 몹시 절었습니다.
삼촌의 그림자가 휘청휘청 골목 끝에서 아주 사라질 때까지 자매는 서 있다가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때는 둘다 눈밑이 흥건히 젖었습니다.
새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언니는 요즘들어 자주 늧곤 했습니다. 동생은 저녁을 지어놓고 마냥 언니를 기다렸습니다.
“언니, 오늘도 늧었네. 배 고프겠다. 빨리 밥 먹자.”
“저런, 여태 밥 안 먹었어? 배가 많이 고팠겠다.”
언니는 몹시 미안해 했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언니는 늧게 집으로 왔습니다. 한달후,

언니는 고운 장미꽃 한 다발과 선물을 한아름 안고 집으로 왔습니다.
“축하해. 이건 생일 선물이야!”
“언니가 그동안 아르바이트 한 거 다 알아.”
동생은 말없이 언니를 꼬옥 껴안았습니다.
장미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아, 이 향기!”

자매는 번갈아 향내를 맡았습니다. 무척이나 행복한 모습으로.
그제야 나는 내가 향기를 낼 수 없는 조화라는 사실이 슬퍼졌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누구나 향기를 가지는 데 나처럼 생명이 없는 것들은 아무런 향기도 가질 수 없습니다.
나도 생명을 가질 수 있었으면….

나를 만든 그 사람은 다른 사물의 모양을 본 뜰 수는 있지만 생명은 조금도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그저 남의 흉내만 내다가 나중엔 쓰레기통에 던져져 버릴 종이꽃.
그런 하찮은 종이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나는 통곡하고 싶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보아주지 않는 높은 선반으로 나는 옮겨졌습니다. 내가 있던 화장대 옆 자리를 내 주어야 했거든요.
다음날도 다음날도 장미는 화병 안에서 숨을 쉬었고 달콤한 향기를 풀어놓았습니다.
나는 이미 자매에게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나는 종이꽃이야. 죽을 때까지 한웅큼의 향기도 만들 수 없는.’
그렇게 체념하고 말았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장미는 낯빛이 창백해지더니 한잎두잎 꽃잎을 떨구기 시작했습니다. 왜 저럴까? 왜 저렇게 기운이 없어 뵈는 걸까?

이상했습니다.
“아깝다. 꽃이 벌써 시들다니.”
언니는 시든 꽃송이를 화병에서 뽑아냈습니다.
꽃은 계속 시들어서 닷새째 되던 날에는 꽃잎이 정신없이 후루루 쏱아져 내렸습니다. 마치 피를 토하듯이 그렇게.

나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습니다. 생명이 그렇게 허무하다니요.
그날 저녁 삼촌이 찾아왔습니다.
“그래도 말이야. 장미는 내년에 다시 피잖니? 생명의 뿌리가 남아있으니까.”
생명의 뿌리가 남아있다구?
나는 귀가 활짝 트였습니다. 그랬구나. 생명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구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아, 나도 생명을 가질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향기를 나눠줄 수 있다면.
내 소망은 질겼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색이 바래지고 때가 끼어 점점 흉한 모습이 되어갔습니다.
“언니, 이 꽃 좀 봐. 버려야겠다.”
“그래, 더 이상은 못 봐 주겠다.”

난 버려졌습니다.그리고 청소차에 실려 쓰레기하치장으로 온 것입니다. 온갖 쓰레기들이 뒤엉켜 죽음을 기다리는 곳.
“이렇게 죽다니 말도 안돼!”
나는 분해서 소리쳤습니다. 생명은커녕 삶의 아무런 가치도 없이, 부질없이 죽어버리다니 왜 나만 그래야 하는지 억울했습니다.
불길이 치솟더니 뱀의 혓바닥 같은 날카로운 불길이 사정없이 내게 덤벼들었습니다.나는 몸부림을 쳤습니다.이렇게 사라지고 싶지않았습니다.
뜨거운 불길과 함께 서릿발같은 내 분노도 타 올랐습니다.
이윽고 고스란히 남은 한줌의 재.

내 마지막 모습은 차라리 고요했습니다.
일주일 뒤,
나는 뱃속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걸 느꼈습니다.
“이상하다. 뭐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벌레처럼 살아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흥건히 고였습니다.내 뱃속에서 고물거리며 자라는 그것, 그것은 뜨거운 생명의 씨톨이었습니다.
나는 정성껏 그 생명을 품었습니다.
햇님은 날마다 찾아와 따스한 햇살을 한줌씩 나누어주곤 했습니다.
열흘 뒤,

첫새벽 이슬이 촉촉이 내렸을 때 내 작은 풀씨는 드디어 별빛같은 눈을 반짝하고 떴습니다.
“저런 쓰레기 속에서도 생명이 자라다니.”
“저 고운 떡잎 좀 봐!”
역한 냄새 가득한 쓰레기 하치장에 은은히 생명의 향기가 번졌습니다. 내가 바로 그 향기의 주인이 될 줄이야!
벅차 오르는 환희를 누르며 나는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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