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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호

큰 밤나무 할아버지
  글·김은재 (1990년대 새 벗과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동화 당선으로 글쓰기를 시작하였으며, 장편동화 ‘들꽃아이’, 그림책 ‘노란 모자’ ‘하얀 눈 이불’ ‘냠냠 치카치카’ ‘할머니 손은 딱딱해’ 등이 있고, 전도용 소책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가 있습니다)
너무 오래 살아서 옆구리에 구멍이 난 큰 밤나무가 있답니다. 큰 밤나무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바람이 불어와 가지를 흔들면 큰 밤나무는 숨을 몰아쉬며 말하곤 하지요.
“저리 가렴. 저리 가.”
그런다고 바람이 그냥 지나친 적은 한 번도 없지만요.
큰 밤나무는 몸만 힘든 게 아니에요. 마음도 몸처럼 쭈글쭈글 주름살이 진 것 같답니다. 지난 가을에 해주 할멈이 한 말이 자꾸 생각나서 그런 것 같아요.
“에구, 이젠 갈 때가 다 됐어.”
해주 할멈은 아주 꼬부랑 할머니니까, 그 말은 어쩌면 해주 할멈 자신에게 한 말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큰 밤나무는 해주 할멈이 큰 밤나무에게 한 말로만 여겨지는 거예요. 작년 가을에는 밤송이가 몇 개 안 열었거든요.
봄은 오는데, 큰 밤나무는 눈을 뜨기가 싫었어요. 쪼롱 쪼로로롱 종달새의 노랫소리가 들려와도 신이 나지 않았어요. 큰 밤나무가 그러건 말건 따스한 봄 햇살은 포근한 담요처럼 큰 밤나무를 덮어주었어요. 그러자 가지 끝마다 간지러운 기운이 느껴졌어요. 새싹이 트려는 거죠.
큰 밤나무는 할 수 없이 실눈을 뜨고 세상을 보았어요. 봄은 양지쪽 산자락이랑 해주 할멈네 고추밭에 벌써 연두 빛으로 곱게 색칠을 해 놓았어요.
큰 밤나무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설레어 웃음이 나왔지요. 큰 밤나무는 멋쩍었어요. 연두 빛에 금방 마음이 달라지는 게 어쩐지 변덕스러운 거 같아서요.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며 변명을 늘어놓았답니다.
“에구, 하나님. 이 구멍 때문인가 봐요. 정말 쓸쓸했거든요. 하나님이 이 구멍 좀 채워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보니까 옆구리의 구멍이 좀 채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정말로 들었어요. 그래서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어요.
장난꾸러기 바람이 와서 구멍 속을 휘저어 보더니 말했어요.
“왕방귀 뀌다가 뽕 뚫린 거죠?”
“예끼! 방귀 구멍이 아니고 내 주머니란다.”
“주머니라고요? 텅텅 비었는데요?”
“그래. 지금은 비었지만 두고 보렴.”
“뭘 넣을 건데요?”
“그건 비밀이다.”
장난꾸러기 바람이 아무리 물어도 큰 밤나무는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사실은 하나님이 무엇을 채우실 지 큰 밤나무도 잘 몰랐거든요.
다람쥐 두 마리가 찾아온 건 숲이 점점 초록색으로 물들고, 새들이 지지재재 떠드는 오후였어요.
“아이쿠 다리야.”
다람쥐들은 잠시 쉬더니 큰 밤나무의 구멍 속을 살펴보고 나서 공손하게 물었어요.
“저, 우리가 여기에서 살아도 될까요?”
“그럼 되고 말고!”
큰 밤나무는 하나님이 구멍을 채워주시는구나 하고 좋아했어요.
다람쥐들은 들락날락 부지런을 떨며 방을 꾸몄어요. 솔잎을 따다가 초록색 커튼을 달고, 보드라운 풀잎 양탄자도 깔았답니다.
드디어 다람쥐네 방에 아기 다람쥐들이 태어났어요.
“하하하, 다섯 쌍둥이에요, 다섯 쌍둥이!”
아빠가 된 다람쥐가 기쁨에 넘쳐 외쳤어요.
“아이쿠, 다섯 쌍둥이라구?”
큰 밤나무도 허허 웃으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어요.
‘저 예쁜 아기 다람쥐들한테 맛있는 알밤을 주어야지. 하나님도 그러고 싶으실 거야.’
이렇게 생각하니까 큰 밤나무는 갑자기 새 힘이 불끈 불끈 솟는 것 같았어요. 사실 요즘은 일이 힘에 부쳤거든요. 큰 밤나무는 있는 힘을 다 해 일해보기로 마음먹었어요.
뿌리로 영차 영차 샘물을 퍼 올리고, 이파리로 따스한 햇볕을 부지런히 모아,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어요. 큰 밤나무는 온 힘을 다 해 만든 맛난 음식을 먹고 밤꽃을 많이 피웠어요. 밤꽃이 활짝 핀 큰 밤나무는 뭉게구름 같았어요.
벌들이 꽃 냄새를 맡고 날아왔어요.
“밤나무님, 맛있는 꿀 좀 주세요.”
“좋구말구. 맘대로 가져가렴.”
큰 밤나무는 신바람이 났어요. 귀여운 아기 다람쥐들은 아무리 봐도 예쁘기만 하죠, 밤꽃 향기는 폴폴 나죠, 꿀 따러 온 벌들이 붕붕거리는 소리에 잔칫집 같죠, 큰 밤나무는 다람쥐네가 온 후로 날마다 싱글벙글이에요.
뭉게구름처럼 피었던 밤꽃이 지자 송송 밤송이들이 맺혔어요.
밤송이들이 몽실몽실 살이 찌는 동안, 아기 다람쥐들도 무럭무럭 자라났지요.
어느 더운 날, 신나게 뛰어 놀던 아기 다람쥐들이 나뭇가지에 나란히 앉았어요. 가만히 앉아있으니까 금방 심심해 졌나봐요.
“알밤아, 알밤아, 너는 왜 가시 속에 숨어있니?”
막내 다람쥐가 말했어요.
“맞다. 알밤 따먹자.”
“그래. 이만큼 커졌으니까 이제 먹어도 될 거야.”
형 다람쥐들도 맞장구를 쳤어요. 아기 다람쥐들은 밤송이들을 하나씩 골라 잡아당겼어요. 밤송이 가시가 막 찔렀어요.
“아이 따가워.”
그래도 다람쥐들은 밤송이를 마구 잡아당겼어요.
그 때,
“이 놈들!”
하고 천둥치는 소리가 났어요.
아기다람쥐들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땅으로 떨어질 뻔하였어요.
“덜 익은 걸 먹으면 배탈이 나요. 쯧쯧. 가을이 오면 줄 테니 기다려라.”
그 날부터 아기다람쥐들은 큰 밤나무에게 날마다 물어보았어요.
“밤나무 할아버지, 가을이 언제 와요?”
“하늘이 파랗게 높아지고 바람이 서늘하면 가을이란다.”
아기다람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더 높아졌나 하늘부터 보았어요. 바람이 서늘해졌나 코끝을 내밀어 보았어요.
마침내 기다리던 가을이 왔어요. 산에 들에 큰 잔치가 열린 것 같았어요. 나무들은 울긋불긋 새 옷을 입고, 먹을 것도 많았어요.
“얘들아, 어서 모여라.”
큰 밤나무가 아기다람쥐들을 불러모았어요.
“옜다! 알밤 받아라.”
큰 밤나무는 알밤을 떨구어 주었어요.
“와아!”
후두둑 후두둑 알밤이 떨어질 때마다 아기다람쥐들은 손뼉을 치며 소리를 질렀어요. 가시껍질 속에 숨어 있던 알밤은 반들반들 예쁘기도 해요.
알밤을 주워 든 아기다람쥐들은 큰 밤나무에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좋아했어요.
“아니다. 나한테 고맙다고 하지 말아라.”
큰 밤나무가 말했어요.
“그럼 누구한테 해요?”
아기 다람쥐들이 입을 모아 물었어요.
“내 소원을 들어주신 분이 있단다.”
“누군 데요?”
큰 밤나무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기 시작했어요.
“만일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만일 햇볕이 비치지 않았으면
만일 바람과 벌 나비가 오지 않았으면
나는 알밤을 만들 수 없었겠지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지.
이 모든 것 주신 하나님 참 감사해요”
가을 바람이 솨아 불어왔어요.
큰 밤나무의 노래 소리는 가을바람에 실려 높고 높은 하늘까지 올라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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